모두가 떠난 뒤로 다시 혼자가 되었다. 나는 이제 어디로 가야 할 지 몰랐다. 목적은 달성되었고, 문제는 해결되었다. 이제 정부를 떠나 혼자 살아가야 되는 걸까. 대체 내게 남은 것이 무엇일까. 나의 모든 것이 빼앗겼는데. 그가 뺏어간 것이 너무도 많았다.
“마르타!”
아무도 없어야 할 연구소 로비 내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루반의 목소리였다. 어째서 그가 여기 있지? 깊이 생각할 시간이 없었다.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달려갔다.
“위험해, 이쪽으로 와!”
웃음기 섞인 목소리가 들렸고, 그 목소리를 내던 주인공이 얼굴을 드러냈다. 지하 저수조로 내려가는 계단 방향에 루반이 얼굴을 내밀고 서 있었다. 위험하다니,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그 방향으로 달려가 도착하자, 루반은 뒤돌아 계단을 내려갔다. 그를 쫓아가며 외쳤다.
“너 대체 왜 여기 있는 거야!”
그는 대답이 없었다.
“뻔뻔하게 왜 내 앞에 나타났냐고! 왜 자꾸 날 따라다니는 건데! 또 나에게 무슨 짓을 하려고!”
역시나 대답 없이 그는 계단을 내려갔다. 손잡이를 잡으며 그를 따라 내려갔다.
“위험하다는 말은 또 뭔데!”
그러자 그가 멈칫했다. 그리고 내 쪽을 돌아보았다.
“당연히 거짓말이지, 그렇게 말 안 하면 안 올 것 같았어.”
“뭐?”
“마르타, 나에 대한 불신과 증오가 가득 쌓여버렸잖아?”
분명 그랬지만, 난 그가 나에게 위험하다고 말했기 때문에 그를 쫓아온 것이 아니었다. 그저 그의 목소리였기 때문에. 내가 아는 루반의 목소리가, 내 이름을 불렀기 때문에. 본능적으로 목소리를 쫓은 것 뿐이었다. 하지만 어떻게 그리 솔직하게 대답하겠는가. 나는 마치 루반이 한 말에 긍정을 하듯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13화를 다 읽었어요.
13/15
“마르타에게 하고 싶은 얘기가 남았어.”
루반이 손을 뻗어 내 손을 잡았다. 빠르게 내려가던 아까와는 달리, 천천히, 한 칸씩 계단을 내려갔다. 내가 잘 내려오고 있는지 확인하는 것처럼 뒤를 가끔 돌아보면서 내려갔다.
계단에서 완전히 내려오자 그는 내 손을 놓고 두꺼운 문을 열었다. 문을 열자, 그 곳엔 전에 연구소에 왔을 때에 봤던 거대한 지하 저수조가 그대로 있었다. 그는 다시 내 손을 잡고 안으로 끌고 들어갔다.
“놔.”
안으로 들어서자 나는 그의 손을 세게 뿌리쳤다. 그는 태연하게 뿌리쳐진 본인의 손을 내렸다.
“화 많이 났어?”
대답할 가치가 없는 질문이었다.
“사실 말이야, 아직 완전히 이해 못하겠어. 내가 그 정도로 잘못한 건지에 대해서.”
루반은 제스처를 섞어가며 말을 시작했다.
“그래도, 마르타가 화났으니까, 뭐라도 해줘야 될 것 같아.”
루반이 몇 걸음 가까이 다가왔다.
“원하면 때려도 돼.”
루반이 그렇게 말했다. 때려도 괜찮다고. 마치 많이 맞아본 사람처럼, 맞는 것이 개의치 않는 사람처럼. 하지만 누구에게도 자신을 때려달라고 먼저 허락하진 않았을 것이다. 루반이 어떤 사람인지 알기 때문에. 그럼에도 루반은 내게 자신을 때려도 좋다고 허락해 주었다. 무슨 의미가 담겨있는지, 그는 또 무슨 생각으로 이런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루반은 그런 말을 뱉어놓고 실실 웃고 있었다. 아까의 서류가 떠올랐다. 내가 한 일이었다. 내가 벌인 실수였다. 내가 지금까지 달려왔던 모든 것은 내 실수를 깨닫기 위해서였다. 나 때문이었다. 내게 화가 났다. 그리고 루반에게도 화가 났다. 그가 내게 벌인 짓, 그리고 내가 한 실수. 다 하나처럼 느껴졌다. 지금 폭력을 사용함으로써 그 하나의 거대한 화가 해결될 수 있다면, 루반을 화풀이 대상으로 써야 한다. 저 태연한 미소가 걸친 얼굴을 향해서.
“마르타, 있지, 난...”
“닥쳐.”
발에 힘을 실어 넘어뜨리고, 그 위로 여러 차례 폭력을 가했다. 한두 번, 그리고 세 번째쯤, 액체가 손에 묻어나기 시작했다. 코피, 각혈, 터진 피부. 아버지가 검은 액체를 토하며 쓰러졌던 날, 그들은 아버지를 데려갔고, 난 그 이후에 아버지를 다시 만나보지도 못하고 아버지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루반에게 이 사실을 말하며 관리국에 입사하겠다고 말하자, 그는 처음 보는 썩은 표정을 지으며 날 떠났다. 마침내 입사한 관리국에서 친구 시릴을 만났고, 함께 일하며 계속 지낼 수 있다고 생각한 내게, 루반이 다시 나타나 시릴의 잘린 머리를 들이밀었다. 그때를 시작해서, 아멘티스가 한 입 먹어보라며 주었던 고기는 루반의 끔찍한 선물이었고, 루반은 그것도 모자라 내 팔까지 잘라갔다. 곧이어 도착한 연구소에서는 아버지의 죽음이 내 책임에 있음을 알게 되었고, 루반은 다시 내 앞에 나타났다. 루반은 그런 존재였다. 내 악의, 내 지옥, 내 절망.
손을 멈추고 잠시 숨을 골랐다. 아래서 기침 소리가 들렸다. 입안이 터진 듯, 기침엔 피가 섞여 흘렀다. 분명 이 모습을 전에도 본 적이 있었다. 그는 입가의 피와 코에서 흐른 피를 손등으로 벅벅 닦아내었다. 하지만 바로 알 수 있었다. 피를 닦기 위함이 아니라, 괴로운 표정을 숨기기 위함이었음을. 그의 반대 손등은 그의 눈가로 올라갔다. 그의 손등이 그의 눈물을 훔쳤다. 그 꼴 부럽네. 난 이제 반대 손등이라는 게 없는데.
“이제... 풀렸어?”
눈물을 닦은 루반이 물었다. 난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많이 쌓인 화가 곧 쓰러질 것처럼 흔들렸지만, 여기서 끝내기로 했다.
“다행이다. 죽을 뻔했어.”
루반이 웃었다. 그리고 내 손을 양손으로 감쌌다.
“마르타, 난 네가 옆에 있어 줬으면 좋겠어.”
루반이 품에 머리를 기대왔다.
“마르타는 나의 첫 번째 친구니까. 마르타가 날 행복하게 해주니까. 그래서, 마르타가 어떤 일이 생겨도 결국 내 곁으로 돌아올 수 있게 하고 싶었어. 그리고 항상 내 생각을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마르타, 사실 그렇지? 내가 마르타한테 상냥하게 대했을 때보다 네 팔을 잘랐을 때... 마르타는 날 더 많이 생각했지?”
끔찍했다. 벌레가 몸을 기어오르는 감각이었다.
“마르타, 앞으로 나랑 쭉 같이 지내자. 앞으로 예쁜 말만 하고, 예쁜 짓만 해줄게.”
루반은 그렇게 말하며 내 손을 잡고 일으켜 저수조 쪽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사다리를 올라가 해치를 열고 끝에 걸터앉았다. 나 또한 자연스럽게 그 옆에 앉게 되었다. 루반은 다시 입을 열었다.
“우리 처음 만난 날 기억해? 그때, 너무 심심했었는데, 네가 다가와 줬잖아. 웃긴 건, 내가 좋아서 온 게 아니라, 돌 던지지 말라고 하려고 온 거잖아.”
루반이 킥킥대며 웃었다.
“괜찮아, 난 마르타가 사람을 수단으로 대하는 거, 다 알고 있으니까. 하지만 나는, 마르타 그 자체로 좋아.”
“이런 얘기 하려고 여기까지 데리고 온 거야?”
루반의 얘기를 끊고, 내가 먼저 물었다.
“그럼, 듣고 싶은 얘기 있어?”
그 말에 잠시 멈칫하고 고민했다. 루반에게 듣고 싶은 얘기? 사실, 그 전이었다면 많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은, 그저 이 자리를 떠나고 싶었다. 난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가, 가려는 거야?”
“꺼져, 다시는 내 눈앞에 띄지 마. 그때는 정말 죽여버릴 거니까.”
“마르타, 잠깐만, 하고 싶은 말이 남았어!”
“저리 꺼지라고!”
“내가 미안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저수조의 물소리만 이 넓은 공간을 조용히 울릴 뿐, 고래고래 소리치던 내 목소리가 한순간에 숨어버렸다. 그 한마디에, 루반의 사과에. 입을 열었지만, 목소리가 되지 못한 소리가 나오려다가 결국 흩어지고 말았다.
“잘못했어, 마르타.”
손이 떨렸다. 아무 말도, 아무 짓도 하고 싶지 않았다. 토하고 싶은 이 상황을 억누를 시간이 필요했다. 잠시 멈추고 생각을 정리하려 하는 순간에, 루반이 손을 뻗어 내 손을 잡았다.
“마르타.”
“그만, 제발 그만, 그만 좀 하라고!”
화를 못 이겨 손을 세게 뿌리쳤다. 헙, 하고 비명을 삼키는 소리가 뒤에서 들렸다. 몸이 굳었다. 심장이 세게 바닥을 한 번 쳤다. 그리고, 차갑게 식는 감정과, 계속해서 쿵쿵 뛰는 심장. 미친 듯이, 격렬하게 뛰는 심장과 대비되는 굳은 몸. 저수조 해치가 열려 있다.
오래전, 한 신의 아들이 있었다. 자신의 얼굴을 보지 못하는 미소년이었다. 그에겐 얼굴을 보지 않아야 장수한다는 예언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소년은 아름다운 외모를 가졌지만 한 가지 단점이 있었으니, 자존심이 너무 강했다는 것이다. 수많은 인간과 요정들의 고백을 매몰차게 거절하니 한 남자가 복수의 신을 찾아가 저 자에게 사랑을 잃는 것이 무슨 기분인지 깨닫게 하여달라 부탁하였다. 그 저주로 소년은 호수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사랑에 빠졌지만 이루어질 수 없다는 사실에 절망하며 스스로 뛰어들어 죽었다 전해진다.
“루반!”
어릴 적에 계곡에 놀러 갔다가 들은 얘기다. 얘기를 해준 아이는 자신이었다면 빠져 죽지 않고, 매일 그 호수를 찾아가 얼굴을 감상하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얼굴을 감상할 수 있었던 수많은 시간을 익사로 날려버렸다는 것이 멍청하다며 웃었다. 그때부터 물에 대한 생각이 복잡하게 얽혔다. 나에게 물은 생명의 원천이자, 진실을 비추는 거울이었다. 하지만 어쩌면, 어쩌면 물 속 깊은 곳에서부터 사람을 빠져 죽도록 만드는 검은 손길이 존재하지 않을까. 숨을 천천히 조이는 괴물이 물 속에 서식하고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종종 들고는 했다.
“잠깐만, 어딘가, 도구라도...”
사다리를 급하게 내려갔다.
“다른 사다리라도, 제발...”
삐끗, 다리가 걸려 사다리에서 넘어지고 말았다. 바닥에 세게 부딪혀 얼굴과 몸이 얼얼했다. 하필 왼쪽으로 넘어져 한 번에 일어나지 못하고, 다리를 이용해 몸을 반대편으로 돌려야만 겨우 지탱하고 일어날 수 있었다.
비명도 들리지 않으니 더 불안했다.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심장이 계속해서 뛰었다. 잃고 싶지 않았다. 더는 아무것도 잃고 싶지 않았다. 다시 뒤돌아 사다리를 올랐다. 올라가고 올라가, 저수조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물에 묻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숨을 한 번 크게 들이쉬고, 숨을 참고, 아래로 뛰어들었다. 물은 심하게 차가웠다. 몸이 발끝에서부터 얼 것 같았다. 꽤 내려왔다, 싶었을 때, 힘겹게 눈을 뜨자, 깊이, 저 아래에, 보였다. 언뜻 실루엣이 일렁이며 잠겨 있었다. 다시 눈을 감았다. 차가웠다. 아플 정도로 차가웠다. 손을 뻗었고, 무언가 손에 느껴졌다. 허리로 보이는 그것을 감싸안고, 어떻게든 끌고 올라왔다. 올라오고 나서도,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아 여러 번 헐떡였다. 속이 울렁거리고 머리가 어지러웠다. 숨을 여러 번 들이쉬었다 내쉬어도 아프고 답답해 그 무엇도 해소되지 않았다. 루반을 사다리 앞에 걸쳐 올리고, 그 옆에 앉아 오래도록 어쭙잖게 배운 심폐소생술을 시도해 보았다.
“너 때문이잖아... 너 때문에 안 되잖아...”
계속 중얼거렸다. 그리고 알았다. 여긴 아무도 듣지 못하는 공간이었다. 답답하고 화나는 기분에 못 이겨 크게 소리쳐 울었다. 그 무엇도 제대로 되는 게 없었다. 계속해서 절망에 절망만 겹쳐 일었다. 전부 부수고 싶었다. 손에 닿는 대로 던져버리고 싶었다. 아무리 해도 이뤄지지 않을 압박만 반복하다, 지쳐 누웠다. 루반의 다리에 머리를 기대어 누웠다. 알았다, 물 밖으로 꺼냈을 때부터 알았다. 이미 끝났다는 걸. 다 끝났다는 걸. 그리고 역시, 아무것도 돌아오지 않았다. 다시 울었다. 울고 또 울었다. 목이 쉴 정도로 울었다. 루반을 끌어안고 울었다. 어릴 때로 돌아간 것처럼, 그때의 행복했던 시절만큼, 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