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곡의 그 아이는 자신을 루반 벨베도르, 라고 소개했다. 벨베도르라는 성은 익히 들어봤었다. 귀족 취급을 받는 그 집안의 아이가, 왜 계곡에서 아무 보호도 없이 혼자 놀고 있었을까. 물어보고 싶은 건 많았지만, 한 번도 물어보지는 않았다. 그것이 실례라고 아버지께 배웠으니까. 그 아이와 그날 친해졌고, 그 아이의 손을 잡고 거리를 한 바퀴 돌았다. 우린 친한 친구 사이가 되었다. 언젠가부터 학교가 계속 우연히 겹쳤고, 우연히 계속 함께 다니게 되었다. 어릴 적에 사귄 친구들은 모두 시간과 장소가 안 맞아 떨어지기 일쑤였는데, 루반만큼은 계속 내 곁에 머물렀다. 당연히 서로에 대해 모르는 것이 없었다. 루반은 장난스러운 아이였다. 날 자주 비웃고 놀렸으며, 제멋대로에 이기적이었다. 하지만 난 그 모습도 좋았다. 우린 절친이었으니까.
루반을 우리 집에 초대한 적이 있었다. 루반은 자신의 집엔 절대 못 초대한다며 자신이 우리 집에 오겠다며 고집을 부렸고, 손님 방이라고는 존재하지 않는 우리 집에서 내 방 침대 위에 둘이 누웠지만, 루반은 잠에 들지 않고 계속 떠들어대며 웃었다. 시끄럽다며 입을 틀어막자, 틀어막힌 상태에서도 루반은 웃었고, 덕분에 손바닥이 간지러웠다. 결국 시끄럽게 떠들도록 내두었다. 그 이후로 또 같이 자본 적은 없었다. 그리고 며칠 지나지 않았다. 아버지가 정부에게 끌려간 일은. 난 가장 신뢰하던 친구였던 루반에게 모든 걸 털어놓았다. 객관적인 사실부터 해서, 주관적인 추측과, 내가 느꼈던 감정과, 앞으로의 포부. 그리고 루반의 표정은 지금껏 보지 못한 모습으로 일그러졌다. 내가 고민을 털어놓아도 깔깔 웃던 루반이었다. 하지만 그의 표정은 나를 벌레 보듯 했다. 루반도 결국 정부의 자제라는 것인가. 내 의문과 의심을 해결해 줄 사람은 결국 나밖에 없다는 뜻인가. 루반은 내 말에 아무 대답도 해주지 않았다. 그저 그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가버렸다. 루반이 왜 그런 선택을 했을까, 짐작 상으로는 어찌 보면 내가 루반의 가족에 대한 욕을 한 것으로 들릴 수 있으니 기분이 나빠진 걸까, 하면서도 도저히 정확한 퍼즐이 맞춰지지 않아 내 혼란에 한 가지 물음표가 더 쓰였을 뿐이었다. 루반과의 인연은 그날로 끝났다. 이상하게, 루반은 더 이상 학교에 나오지 않았고, 항상 우연하고 기묘하게 마주치던 날들이 일어나지 않았다.
...그런 줄 알았다. 이제 루반과 만날 날은 없을 줄 알았다. 루반은 관리국에 들어오지 않은 것 같으니 내가 안 보이는 곳에서 혼자 잘 살고 있겠거니, 싶었다. 하지만 그 곳이 반정부인 것은 전혀 생각해 보지 못했다. 문으로 들어온 실루엣이 그러했다. 정돈된 정장과 가슴까지 내려오는 짙은 푸른색의 머리를 한 쪽으로 묶은 날렵하고 화려한 인상의 인간.
“마르타―.”
의문형이 아니었다. 내가 여기 있을 것을 다 예상한 어조. 항상 ‘우연히’ 마주치던 그날들과 다를 바 없었다. 수장이 그렇게 말했다. 이 요원이 내 정보를 넘겨주었고, 나와 협성하도록 추진했다고. 다 계략적인 것이었다. 내가 여기 서 있는 이유가 루반의 계략 때문이었다.
“...네가 왜 여기 있어?”
내 질문에 루반은 미소를 짓더니 주방으로 가 와인잔을 씻었다. 가만히 서서 그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루반은 다 씻은 와인잔 두 잔을 들어 식탁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마치 신사처럼, 의자를 빼고 손으로 받치듯 가리켰다. 나와 눈을 마주치면서.
“와인 한잔하며 대화하자, 마르타.”
루반은 말끝에 붙인 내 이름을 강조하며 말했다. 루반의 눈가를 노려보듯 바라보며 지나쳐 자리에 앉았다. 잔에 와인을 따르는 그의 얼굴에는 옅은 미소가 띄어져 있었다. 그는 와인이 반쯤 채워진 잔을 내 앞에 내밀었다. 꽤 두꺼운 유리잔이였다.
“넌 날 떠나버렸잖아. 그 역겨워 죽겠다는 표정을 짓고. 그런데 왜 날 찾아온 거야? 내 뒤를 쫓고, 내 정보를 넘겨주면서?”
내 말에 루반이 가만히 바라보더니 키득키득 웃었다.
“마르타, 난 너를 버린 적이 없어. 네 입장에서나 내가 떠난 것처럼 보였겠지. 네가 착각하고 있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