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역설법 · 마루6화 — 6.

CHAPTER 6

6.

죽음의 역설법 · 약 11분 분량 · 2026.10.04

작가의 말

상해, 살인, 식인 요소 등이 등장하며, 묘사가 자세한 편입니다.

계곡의 그 아이는 자신을 루반 벨베도르, 라고 소개했다. 벨베도르라는 성은 익히 들어봤었다. 귀족 취급을 받는 그 집안의 아이가, 왜 계곡에서 아무 보호도 없이 혼자 놀고 있었을까. 물어보고 싶은 건 많았지만, 한 번도 물어보지는 않았다. 그것이 실례라고 아버지께 배웠으니까. 그 아이와 그날 친해졌고, 그 아이의 손을 잡고 거리를 한 바퀴 돌았다. 우린 친한 친구 사이가 되었다. 언젠가부터 학교가 계속 우연히 겹쳤고, 우연히 계속 함께 다니게 되었다. 어릴 적에 사귄 친구들은 모두 시간과 장소가 안 맞아 떨어지기 일쑤였는데, 루반만큼은 계속 내 곁에 머물렀다. 당연히 서로에 대해 모르는 것이 없었다. 루반은 장난스러운 아이였다. 날 자주 비웃고 놀렸으며, 제멋대로에 이기적이었다. 하지만 난 그 모습도 좋았다. 우린 절친이었으니까.


루반을 우리 집에 초대한 적이 있었다. 루반은 자신의 집엔 절대 못 초대한다며 자신이 우리 집에 오겠다며 고집을 부렸고, 손님 방이라고는 존재하지 않는 우리 집에서 내 방 침대 위에 둘이 누웠지만, 루반은 잠에 들지 않고 계속 떠들어대며 웃었다. 시끄럽다며 입을 틀어막자, 틀어막힌 상태에서도 루반은 웃었고, 덕분에 손바닥이 간지러웠다. 결국 시끄럽게 떠들도록 내두었다. 그 이후로 또 같이 자본 적은 없었다. 그리고 며칠 지나지 않았다. 아버지가 정부에게 끌려간 일은. 난 가장 신뢰하던 친구였던 루반에게 모든 걸 털어놓았다. 객관적인 사실부터 해서, 주관적인 추측과, 내가 느꼈던 감정과, 앞으로의 포부. 그리고 루반의 표정은 지금껏 보지 못한 모습으로 일그러졌다. 내가 고민을 털어놓아도 깔깔 웃던 루반이었다. 하지만 그의 표정은 나를 벌레 보듯 했다. 루반도 결국 정부의 자제라는 것인가. 내 의문과 의심을 해결해 줄 사람은 결국 나밖에 없다는 뜻인가. 루반은 내 말에 아무 대답도 해주지 않았다. 그저 그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가버렸다. 루반이 왜 그런 선택을 했을까, 짐작 상으로는 어찌 보면 내가 루반의 가족에 대한 욕을 한 것으로 들릴 수 있으니 기분이 나빠진 걸까, 하면서도 도저히 정확한 퍼즐이 맞춰지지 않아 내 혼란에 한 가지 물음표가 더 쓰였을 뿐이었다. 루반과의 인연은 그날로 끝났다. 이상하게, 루반은 더 이상 학교에 나오지 않았고, 항상 우연하고 기묘하게 마주치던 날들이 일어나지 않았다.


...그런 줄 알았다. 이제 루반과 만날 날은 없을 줄 알았다. 루반은 관리국에 들어오지 않은 것 같으니 내가 안 보이는 곳에서 혼자 잘 살고 있겠거니, 싶었다. 하지만 그 곳이 반정부인 것은 전혀 생각해 보지 못했다. 문으로 들어온 실루엣이 그러했다. 정돈된 정장과 가슴까지 내려오는 짙은 푸른색의 머리를 한 쪽으로 묶은 날렵하고 화려한 인상의 인간.


“마르타―.”


의문형이 아니었다. 내가 여기 있을 것을 다 예상한 어조. 항상 ‘우연히’ 마주치던 그날들과 다를 바 없었다. 수장이 그렇게 말했다. 이 요원이 내 정보를 넘겨주었고, 나와 협성하도록 추진했다고. 다 계략적인 것이었다. 내가 여기 서 있는 이유가 루반의 계략 때문이었다.


“...네가 왜 여기 있어?”


내 질문에 루반은 미소를 짓더니 주방으로 가 와인잔을 씻었다. 가만히 서서 그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루반은 다 씻은 와인잔 두 잔을 들어 식탁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마치 신사처럼, 의자를 빼고 손으로 받치듯 가리켰다. 나와 눈을 마주치면서.


“와인 한잔하며 대화하자, 마르타.”


루반은 말끝에 붙인 내 이름을 강조하며 말했다. 루반의 눈가를 노려보듯 바라보며 지나쳐 자리에 앉았다. 잔에 와인을 따르는 그의 얼굴에는 옅은 미소가 띄어져 있었다. 그는 와인이 반쯤 채워진 잔을 내 앞에 내밀었다. 꽤 두꺼운 유리잔이였다.


“넌 날 떠나버렸잖아. 그 역겨워 죽겠다는 표정을 짓고. 그런데 왜 날 찾아온 거야? 내 뒤를 쫓고, 내 정보를 넘겨주면서?”


내 말에 루반이 가만히 바라보더니 키득키득 웃었다.


“마르타, 난 너를 버린 적이 없어. 네 입장에서나 내가 떠난 것처럼 보였겠지. 네가 착각하고 있는 거야.”

6화를 다 읽었어요.

이전 화
0%다음 화
6/15

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이었다.


“있지, 마르타. 네가 시릴이랑 친해진 거 알고 있어.”


그 말에 눈에 띄게 당황해 버렸다. 분명 그 모습이 우스웠을 것이다.


“난 너와 멀어진 이후로도 너를 쭉 지켜봤으니까.”


그는 턱을 괴며 내 쪽을 바라보았다.


“너는 날 좋아해. 우린 계속 함께할 수 있었어. 하지만 네가 모든 걸 망친 거야. 알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여전히. 내 말에 나를 버린 것 그였다. 아무리 다가가려 해도 루반은 날 무시했다. 대체 내가 뭘 했다는 것인지, 루반은 그 이후로 왜 날 쫓았는지, 대답을 들었음에도 아무것도 이해되지 않았다.


“알아듣게 말해.”


“무섭게 굴지 마. 네가 다 알아야 할 필요는 없어. 그저 이제 나랑 있는 순간을 즐기면 돼.“


“나와 관련한 일이니까 당연히 내가 알아야지.”


루반은 옅은 미소에 싸늘함을 한 방울 떨어뜨린 듯 싸한 미소를 지었다.


“하나는 알려줄게. 널 다시 만나려 했던 이유를, 약속 장소에서. 나랑 놀아주면 약속 장소를 말해줄 테니, 다음 날 밤에 찾아와줘.”


루반은 바뀐 것이 없었다. 항상 막무가내였고, 장난이 가득했으며, 비밀스러운 곳투성이였다. 자신이 우위에 서 있다고 생각했고, 친구 관계의 서열을 중요시했다. 그의 세상에선, 그가 항상 왕이었다. 쉽게 내게 친절을 베풀어주는 일이 없었다.


“뭐, 어떻게 놀아 줘.”


“체스하자. 전력으로 임해야 해.”


학창 시절에도 자주 즐기던 놀이였다. 이따금 시릴과 즐기기도 했지만, 내가 이기면 토라져 버리는 루반의 맛과는 달랐다.


“해.”


체스는 하나의 작은 전쟁과 같은 놀이였다. 수많은 기사와 탑이 왕을 지키기 위해 상대방의 말을 하나씩 쓰러뜨리고 끝내 상대방의 왕을 쓰러뜨리려 하지만, 왕이 도망치거나 주변 말들이 보호해 줄 구석을 막기만 하면 왕을 쓰러뜨리지도 못했는데 승리하는 아이러니한 놀이다.


흰색의 폰이 루반의 손에서 움직였다. 한 칸.


“마시면서 해.”


한 잔.


“마르타.”


나의 한 칸.


“왜.”


한 잔.


“네가 우리를 망친 거야.”


비숍의 세 칸.


“대체 왜 그딴 소리를 지껄이는 거야? 내가 뭘 했는데? 난 그냥 널 신뢰했을 뿐이야. 그 말의 뭐가 불만이었던 거냐고.”


“언젠가 다 알려줄 거야.”


“하.”


“알려줄 생각 없었어. 마르타는 다혈질이니까. 내 말 진지하게 들어주지 않을 거잖아? 그래도, 네가 그렇게 간절하게 궁금해한다니까 알려주려고.”


또 자신이 우위에 서 있고, 나에게 특별히 친절을 하사하겠다는 말투. 루반은 그 말투를 사용했다. 그 말투와 동시에 루반의 손에서 퀸이 움직였다. 자유분방한 퀸이 밖으로 나왔다.


“체크.”


퀸을 잡을 구석은 없었으니, 속된 말로 찌질하지만 킹을 옮겼다.


“재미없어―. 아, 세상에, 위기에 봉착해 버렸어―. 같이 말해달라고.”


루반이 한 쪽 볼에 바람을 채웠다. 머리카락을 쥐어뜯고 싶은 마음이다. 체스 하나에 바라는 게 왜 이리도 많은지.


“마르타, 네가 내게 기대하는 질문의 대답 이외에 네가 기대하지 않았던 질문도, 대답 들어보고 싶지 않아?”


“그게 무슨 말이야.”


“예를 들면 너희 아버지 얘기 같은 것.”


“뭐?”


루반의 퀸은 또 체크를 노리고 있었다.


“어릴 때, 네 아버지 이름으로 된 신체 건강 조사서를 읽은 적이 있어.”


내 손에 쥐어진 건 폰이다.


“이상했어. 거기 적힌 건 너무 자세했거든. 본인도 몰랐을 정보가 징그럽게 적혀 있었어. 솔직히 역겨워.”


“그 역겹다는 소리 좀 그만해.”


“아직도 기억해. 어떤 짐승과 유사도가 가장 높은지.”


짐승과의 유사도?


괴물의 근본은 짐승에 있다. 짐승에게서 의미 불명의 유전자 변이로 인한 돌연변이가 발생하면, 그 돌연변이는 자신의 가족과 무리부터 시작해 점차 주변 짐승을 잡아먹는다. 짐승을 다수 잡아먹은 돌연변이는 점차 유전자 형질이 뒤틀리며 괴생명체를 띄고, 인간을 잡아먹게 된다. 괴생명체는 자신과 비슷한 속성과 종족을 잡아먹는 특성이 강하기 때문에, 짐승과의 유사도를 사전에 조사해 요원들이 잡아먹히는 사태를 줄이고자 했던 것일까?


“마르타는 정말 순진한 것 같아.”


“뭐?”


“체크메이트야.”


루반은 와인 한 잔을 몇 방울 마시더니 내려놓고, 퀸을 움직였다. 그러자 판이 끝나버렸다. 내가 도망칠 구석도, 날 지켜줄 사람도 없었다. 외로운 패배였다.


“자, 벌이야.”


루반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부엌 쪽으로 갔다. 서랍에서 무언가 병을 들고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독하기로 유명한 술이었다. 루반은 뚜껑을 따는 것이 순조롭고 익숙해 보였다. 순조롭게 따진 뚜껑은 바닥을 굴렀고, 루반은 술병을 기울여 내 술잔의 반을 채웠다.


“한 번에 쭉, 알았지?”


루반이 웃음을 지었다. 내 잔에 술이 찰랑이고 있었다.


“벌 같은 거 없었잖아. 그냥 놀아주면 약속 장소를 말해주겠다며. 왜 또 네 멋대로 굴어?”


“재미없게 굴지 마. 승자가 마시라면 마셔야 되는 거잖아.”


그의 입꼬리가 살짝 내려갔다.


“약속 장소나 말해. 난 어서 돌아가서 씻고 자려니까.”


의자가 끼긱, 소리를 내며 밀려났다. 루반이 손을 뻗어 내 잔을 집었다. 잔을 세게 책상에 내리친 탓인지, 방울이 주변에 튀었다. 방울이 떨어져 나가 아까보다 양이 준 술을, 루반은 내 입가에 내밀었다.


“마르타는 나에 대해 배우는 거 좋아하지? 날 좋아하니까.”


“무슨 소리야, 또.”


“수첩에 바르고 예쁜 글씨로 적어놔. 루반은 강압적인 걸 좋아한다고.”


그 말이 끝나자마자 루반은 입술을 엄지로 짓눌러 벌리고 어떻게든 술을 쏟아부었다. 입안에서부터 식도까지 불을 댄 듯 천천히 타오르는 감각이 느껴졌다. 통증이었다. 음식을 먹을 때에 흔히 느끼는 감각이 아니었다. 확실하고 극심한 통증이었다. 난 손을 뻗어 루반의 옷깃을 잡았고, 그 아래를 그대로 세게 걷어찼다. 짧게 컥, 하고 숨이 막히는 소리와 바닥에 넘어져 쿠당, 하는 소리가 이어졌다. 일어나지 못하도록 앞에 무릎을 꿇어 눈을 마주하고 손을 세게 짓눌러 바닥에 붙였다.


“아프잖아.”


루반이 투정을 부렸다.


“마르타가 벌을 거부한 거잖아. 내 말에 불이행한 건 너잖아. 내가 직접 네 잔에 따라주기까지 했는데.”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어?”


투정을 부리는 그 얼굴을 치려다, 내 손이 떼어지자마자 먼저 주먹을 날린 루반에게 맞아 입에서 피가 흘렀다. 입 안쪽 여린 살이 찢어진 듯했다. 헛웃음이 나왔고, 일어나 그 배를 부츠의 굽 끝으로 지르밟았다.


“넌 좀 맞아야 할 필요가 있어.”


“아하, 마르타는 폭력적인 걸 좋아하는구나. 수첩에 적어둘게.”


허, 하, 하고 끊기는 웃음소리가 입 안쪽 피와 함께 흘러나왔다. 지르밟던 발을 멈췄다. 의지가 웃음소리처럼 끊어졌다.


“약속 장소, 어서 말해. 내일 찾아갈게.”


“우리 다녔던 학교.”


“학교...?”


“근처에 자주 쉬던 곳.”


바로 대답 하지 않았다. 대충 그 곳에서의 기억이 머릿속에 희미하게 그려졌다. 배에서 발을 뗐다. 옷으로 가려진 맨 배 위에는 멍이 들어있을 것이다. 어쩌면 장기가 손상되었겠지.


“알았어.”


세 글자 이후엔 잠시 입안에 침묵이 돌았다. 철 맛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