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ichBli · Abyss2화 — 경성

CHAPTER 2

경성

RichBli · 약 9분 분량 · 2026.10.04

작가의 말

구한말 경성 배경

상인은 눈이 내리면 서역으로 돌아간다고 했다.

먹 같은 하늘에서 희멀건 것들이 하나둘씩 떨어지기 시작했다. 며칠 내내 늦은 시간까지 하늘을 올려다보다 시간을 죄 흘려보내고 만 바람에, 더는 미룰 수 없는 작문 숙제를 하려 창문을 굳게 닫은 이수는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흰 종이 위에 서걱거리는 연필이 몇 번 지나가면 문장이 완성되었다. 쓰이는 것보다 지워지는 게 더 많았지만, 한 번 남기기를 결정한 문장은 채워진 채 종이 위에 앉았다. 고요한 방에 유일한 소음은 이수의 소매가 책상을 스치거나, 종이 위에 문질러지는 지우개 소리, 연필이 종이 위를 긁는 것 뿐이었다.

툭, 툭. 낯선 소음이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왔다. 무시로 일관했으나 끈질기게 들려오는 소음에 결국 이수는 자리에서 일어나고 말았다. 근원지는 제 손으로 닫은 창문 너머였다. 가끔 짓궂은 장난을 치던 그가 떠올라 혹시 싶은 마음에 창문을 열자, 기대하던 손님이 아닌 불청객이 얼굴 위로 쏟아져 내렸다. 겨울이 다가올수록 초조했던 마음이 눈송이를 본 순간 얼어붙는 것 같았다. 얼굴에 닿는 순간 사라질 덧없는 객과 함께, 문이 열린 틈을 놓치지 않고 들어온 파괴적인 겨울의 향기가 이수를 덮쳤다.

덜컥 겁을 먹었다. 첫눈은 쌓이지도 않고 스쳐 지나가기 마련이라는데, 당장이라도 그가 떠날 것 같은 불안에 휩싸여서. 이수는 옷조차 제대로 입지 못하고, 신발도 구겨 신은 채 무작정 달려 나가 상점 문을 두드렸다. 통금 시간이라는 건 안중에도 없었다. 그를 봐야만 했다.


—


한밤중의 소란에 천천히 나온 인영이 문을 열었다. 서로 다른 색의 눈을 확인하자마자 이수는 그의 품에 안겼다. 어떤 말도, 설명도 없이. 그 역시 이수의 얼굴을 확인한 그 짧은 순간, 한 손으로 품에 안긴 이의 허리를 단단히 감싼 뒤 다른 손으로 등 뒤에 선 사람에게 손짓했다.

팔 하나에 다 담기는 여린 몸이 그의 품에 안겨서 가쁜 숨을 내쉬고 있었다. 사정없이 떨리고 있는 온몸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게 만들었다. 다만 진정되지 않은 상태의 이수에게 곧바로 물을 수 없어 그는 그저 안아주는 것으로 위로를 전달했다. 이수의 등에 닿는 손길이 일정한 간격을 두고 끊임없이 이어졌다.

눈을 감고 그의 품에서 감정을 애써 눌러 내리는 이수의 코 끝으로 매캐한 담배 냄새가 맡아졌다. 철컥, 금속 장치의 둔탁한 소리까지 이어지자, 이수가 그의 품에서 빠져나와 고개를 들었다. 담배를 문 채 막 탄창을 빼고 있던 미요시가 이수와 시선을 마주하곤 웃어 보였다.


“안녕, 이수.”


언제나 아름다운 이의 미소를 보자 제 꼴이 머리에 스쳐, 이수는 붉은 얼굴을 내려 숨겼다. 그 와중에도 작은 목소리로 인사를 되돌리는 이수의 뒷머리를 보며 미요시가 웃음소리를 흘렸다.


- “무슨 일이야.”


물음 뒤로 밖에서 통행금지 시간을 알리는 종이 울렸다. 대답을 듣지 못한 그는 이수와 상점 밖을 나서는 대신 문을 잠그는 선택을 했다.

미요시는 총을 서랍 안에 되돌리고 있었고, 이수는 고개를 숙이고 선 채 손가락을 꾸물거리고 있었다. 이수에게 다가가자 이수가 고개를 들고는, 리처드…… 하며 그의 이름을 속삭였다.


- “무슨 일인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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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


나직하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담은 제 이름에 입술을 깨문 이수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주체할 수 없는 감정이 터져 나와서 하염없이 우는 이수의 등을 리처드는 아까와 같이 조심조심 쓸어주었다.


- “그래, 일단 울어.”


리처드의 다정함에 이수는 아득해졌다. 이걸 잃고 살아갈 수 있을까? 그의 다정은 울음을 그치게 하는 대신, 언제나 눈물의 이유가 되었다.

미요시가 자리를 비켜주고, 리처드는 우는 이수를 이끌고 방으로 향했다. 그의 성격처럼 곱게 정돈된 방에서 이수는 흐트러진 차림새로 눈물을 소매 아래 꾹꾹 눌러 삼켰다.

흐느낌이 잦아들었다. 눈물은 아직도 흘렀지만 입을 열어 말을 할 정도로 진정은 됐다. 그런 이수의 상태를 놓치지 않은 리처드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 “어머니 때문이야?”


이수가 고개를 젓자 곧바로 다른 물음이 뒤를 이었다.


- “그럼 무슨 일인데.”


이수는 차마 말할 수 없었다. 어떻게 말을 할까. 당신이 떠난다는 걸 알았을 때부터 나는 시간이 가는 게 두렵고, 겨울이 무서워졌다고. 잠들면 당신이 없는 세상에서 미아처럼 당신을 찾고 또 찾는 악몽에 짓눌려 하루에도 수십 번 깨어나서 달력을 확인한다고.

—아직 아니야, 아직, 아직.

그런데 시간이 너무 잔인하게 빠르게, 저를 스쳐 가고 있음에. 차라리 이 시간 속에 나를 가두고 싶은 마음이 불쑥불쑥 차오른다고.

머리에 당신이 너무 가득해서 내가 미쳐버린 것 같다고. 내 온 하루가 온통 당신이라서. 내가, 내가 아닌 당신으로만 채워져서.

그래서 이 밤에 당신을 찾았노라고.


- “……리처드가 보고 싶어서요.”

- “그렇게 울었으면서?”

- “너무, 보고 싶어서요.”


이수는 절반의 진심만 털어놓았다. 리처드의 날카로운 눈이 이수 안에 남은 심연을 바라보듯 지긋하게 보고 있었다. 이수는 분명 검게 물들어 있을 제 나머지 잔여물을 들키지 않기 위해 그의 시선을 피했다. 이 와중에도 당신 눈이 나를 담고 있는 게 좋아서, 그토록 울었는데 웃음이 날 것 같다면. 내가 정말 미쳐버린 게 아닐까.

눈물을 다 털어내지 못하고 머금은 눈이 리처드를 몇 번이고 스쳤다. 들키고 싶지 않은데, 바라보지 않을 수 없는 이수의 마음이 눈동자에 투명하게 담겨 있었다. 어쩐지 애처롭게 빛나는 눈을 본 리처드가 손가락으로 맺혀 있는 눈물을 훔쳐내 주었다.

리처드는 이수를 잘 알고 있었다. 절대 이유 없이 이런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는 걸. 이렇게 감정에 휩쓸린 행동을 하는 아이가 아니기에, 그냥 얘가 왜 이럴까 가늠하면서 눈 밑의 여린 살을 매만져 물기를 지우기만 했다.


“제가, 리처드를 좋아해서요.”


그 말에 모든 움직임이 멎었다.

고백이라기보단 정말 토해냄 그 자체인 말이었다. 터질 것 같은 감정이 꾹꾹 눌러지다가 결국 입 밖으로 툭 터져 나오듯.

그래도 다행인 건, 그는 이 말을 알아듣지 못할 테니까. 영어나 일본어가 아닌…… 이름을 빼앗기고 자유를 잃어버린, 그가 잠시 몸담았다 떠나버릴 이 작은 이국의 언어를. 그는 잘 모른다.

리처드의 알 수 없는 얼굴을 바라보면서 이수가 눈을 감고 웃어버렸다. 몸 안 어딘가 고장 난 것처럼, 눈물이 다시 새어 나와 리처드의 손을 타고 뺨에 조용히 흘러내렸다.


“리처드를 사랑해요.”


—그 어느 날, 서로에게 이름을 내어주고. 서로가 모르는 저만의 언어에 각주를 달아 뜻을 알려주며 배웠던 날이 있었다.

그게 그런 뜻이야? 황당해하기도 하고. 저는 이 의미가 마음에 들어요, 뺨이 붉어진 채 앎을 즐거워했다.


- ‘이건 설명이 없는데.’


그러다 그의 손가락이 종이의 어느 부분에 멈췄다. 그가 가리킨 단어를 이수는 끝까지 보충하지 못했다. 서로에게 알려주고 싶은 말을 적는 거였는데, 그건 정말 이수가 가지고 있던 작고 초라한 마음이라서.

이수는 리처드가 볼 수 없게 서둘러 종이를 뜯어 손안에 숨기고, 아무것도 아니라며 자리에서 일어나 도망쳤다. 겨울을 바라보기엔 아득하게 먼…… 녹음이 우거진 초여름의 일이었다.


그러니까 그는 모를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내뱉을 수 있던 말이었다. 이수는 감았던 눈을 조심스럽게 뜨고 여전히 눈앞에 있는 리처드를 마주했다.


- “그냥 꿈을 꿔서 불안했어요.”


이전의 말은 아무 의미도 없는 척 문장을 더했다. 왜냐하면 그는 떠날 사람이니까. ……이수의 아버지가 그러했듯이. 겨우 한 번 말했다고 무거웠던 마음이 조금은 가벼워진 느낌이라, 이수는 동화 속 어느 소년의 마음을 이해했다. 상대가 알아듣지 못해도. 토해낸 것만으로도. 이토록 내려놓는 기분이 드는구나.

여전히 저를 바라보고 있는 리처드에게 이수가 어눌한 영어로 ‘악몽’을 다시 한번 발음했다. 그리곤 미요시에게 아까 전 인사를 제대로 못 했다며 일어났다.


- “대답은.”


리처드가 이수의 팔을 잡고 막지 않았다면. 분명 문을 열고 나갔을 터였다.


- “대답은 필요 없어?”


리처드의 말에 의아해진 이수가 멍하니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제가 한 말에, 리처드의 대답이 필요한 게 있던가?

방금 전의 대화를 복기하던 이수의 눈동자가 세차게 흔들렸다. 아니, 설마. 그럴 리가.


“이수.”


이수는 묻지 않았다.

애초에 그의 마음이 저와 같을 것이라고는 단 한 번도 생각하지 않았으니까.


- “유독 눌러쓴 글씨였어.”

“무슨…….”

- “그 아래까지 새겨지도록 깊게, 눌러쓴 단어라서 찾아볼 수 있었어.”


그와 이수의 시간이 거슬러 올라간다. 잔인한 겨울을 지나쳐 초조로 가득한 가을을 스치고, 뺨에 닿는 햇살보다 더 뜨거운 심장의 온도로 사랑을 깨달았던 여름으로.


- “너무 명료해서 헷갈릴 수도 없는 단어였어. 그 단어가 어떤 대상에게 쓰이는지도 정말 명확하거든.”

“…….”

- “그러니까 대답할게.”


떨림이 가득한 서로 다른 색의 눈동자가 리처드의 얼굴 위를 방황했다.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이.


“이수.”


마르지 않는 샘이 눈 속에 숨어있는 게 아닐까. 순식간에 다시 차오른 눈물이 이수의 뺨 위로 흘러내렸다. 바라지 않던 순간이었다. 아니, 너무 바라는 바람에 포기했던 기적 같은…… 지금.


- “I love you.”


그는 숨기지 않았고, 이수는 뜻을 찾아볼 필요가 없었다.

이미 알고 있었으니까. 언젠가 그에게 말해주고 싶어서 혼자 사전을 찾아 배웠던 말이었으니까.


“널 사랑해.”


마치 나도 너와 같다는 듯이…….

리처드는 이수의 언어로도 똑같은 답을 되풀이 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