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ichBli · Abyss1화 — Fatum Tangitur

CHAPTER 1

Fatum Tangitur

RichBli · 약 19분 분량 · 2026.10.04

작가의 말

블리스 여자 IF 소설

어머니는 그녀가 뇌관을 품은 채 태어났다고 말했다.

그 뇌관이 자라 그녀 자신을 부수기 전까지 잘 지켜야 한다고도.

—

능력의 존재를 알게 된 순간부터 블리스는 어머니가 말한 뇌관이 능력을 가리키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드러난 순간 재앙을 가져온 그 능력이 마치 다이너마이트 같았으니까.

하지만 어머니의 당부에도 그녀의 심지에 불이 붙은 지는 오래되었다. 베개를 끌어안고 눈보라 속에서 오지 않을 부모님을 기다리던 그때 이미. 추위에 촛불을 켜던 어느 성냥팔이 소녀처럼 몸을 태워 겨울을 이기려고 했다. 소녀가 살기 위한 이유였다면, 그녀는 죽음을 이유로 했다. 소녀는 불꽃 속에서 꿈을 꾸었고, 그녀는 흐려진 추억을 보았다.

‘널 소중히 여기지 않으면 안 돼.’

지켜야 한다고 말해주던 어머니가 없으니 포기하기도 쉬웠다. 가족과 멀어지게 된 이유가 능력이라면 능력이 없는 채로 태어나는 편이 나았다. 단 한 번도 필요로 한 적 없었으니까.

어쨌든 그런 이유로, 블리스는 저 스스로 심지에 불을 지폈다. 빛의 이름을 가졌으니 불꽃과 함께 사라지는 게 자신에게 어울리는 결말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녀의 ‘능력’은 선택해서 가진 것이 아니었기에, 결국 사라질 것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심지에 붙은 불꽃이 꺼지지 않았기에 블리스는 기다리기로 했다. 언제까지 타오를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기에 기다림에도 기약이 없었다. 그냥 무엇이든 읽다 보면, 보다 보면 능력이 끝나지 않을까.

짧은 시간을 역행하는 게 전부였던 능력이 점점 더 끝없이 날개를 펼치기 시작했을 무렵. 언제든 제 숨이 멈추리라 확신한 블리스는 심호흡을 자주 했다. 숨을 쉴 수 없는 고통에 익숙해지면, 죽음도 더 쉬워질까 했다.

그러나 심호흡을 자주 하던 아이가 어엿한 여자가 되기까지도 뇌관은 그대로였다. 죽음이 찾아오지 않았다. 불꽃은 계속해서 타올랐다. 손을 대 볼 수 있는 과거가 쌓여갔다. 블리스는 습관처럼 숨을 참았다. 매 순간 흔들리며 살아왔는데, 어째서 아직도?

“부서질 준비가 되었는데. 전 왜 여전히 살아가야 하나요, 어머니?”

텅 빈 방을 목소리가 가득 채웠다. 대답은 없었다.

—

블리스는 이름을 버리지 않았다. 입양의 순간 그녀가 선택할 수 있었던 유일한 조건이었다. 이름마저 버리면, 아무도 그녀를 찾을 수 없을 테니까. 이상한 믿음이었다. 간직하면 분명 인연이 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미래에 대한 확신보단 기도에 가까운 바람이었다. 자신도 모르게 간직한 ‘바람’에, 불꽃이 꺼진 것도 모를 만큼. 그랬기에 그녀가 살아갈 수 있었다는 것도.

죽음에 대한 열망보다도 더, 그녀는 가족을 사랑했다.

양아버지는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첫 순간부터 그는 블리스의 가치를 알아보고 그걸 훼손시키지 않는데 온 힘을 쏟았다. 모든 교육은 그가 담당했고, 블리스는 사람들과 단절된 삶을 살았다. 사실 만나지 않는 편이 블리스에게는 나은 일이었다. 능력을 멈출 수 없으니 관계를 만들지 않는 게 그녀에게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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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늘 과거 속을 유영했지만 시간은 앞으로 흘렀다. 나이를 먹는 것과 비례해서 그녀도 성장했다. 어느 순간부터 옷이 부쩍 작아져 발목이 드레스 밑으로 드러나게 되자 양아버지는 때가 되었다는 듯 저택의 문을 열었다. 수년 만에 블리스는 그렇게 세상에 다시 나오게 되었다.

그녀는 양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고급 상점의 제일 귀중한 물건처럼 다뤄졌다. 질 좋은 옷감으로 드레스를 차려입은 채 거리가 보이는 창가에 전시되었다. 마치 상품처럼. 경매장에서 마지막 상품을 뜸 들이고 공들여 선보이는 것과는 다르게 그녀는 사람들의 호기심과 무분별한 비난 앞에 예고 없이 서게 되었다. 그 사이를 막고 있는 것은 고작 유리 한 장이었다.

가게에 장식된 블리스의 사진이 신문의 일면을 채웠던 날, 그녀는 사람들이 기괴하다며 거리에 신문을 버리고 가는 것을 창문 너머로 바라보았다. 인형처럼 자리한 여자가 수많은 신발 아래 구겨지고 더러워졌다. 마치 미래의 단면을 보여주듯. 유리는 썩은 날계란이나, 돌멩이 따위를 막아 주었지만 악의는 막아주지 않았다. 손가락질을 받을 때마다 그녀는 등을 돌리고 섰다. 전시장 속 마리오네트처럼.

좋은 쪽으로는 아니었지만 어쨌든 유명세를 치르게 되자 창가에 검은 암막이 드리워졌다. 블리스는 시선에서 벗어난 것에 안도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레이스 장갑으로 가린 손과 닿기 위해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금화를 들고 양아버지를 찾기 시작했다.

누군가는 탐욕스러운 눈으로 그녀의 값을 계산했고, 음유시인은 그녀가 자신의 운명이라며 노래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소름 끼친다며 그녀를 피했다. 단순히 손을 잡는 것만으로 일대기를 읽어낼 수 있는 능력이었으니 당연했다. 블리스는 차라리 그런 사람들이 편했다. 경계하는 게 당연했다. 자신이라도 자신 같은 사람을 피했을 테니.

‘신문에서 봤을 땐 거짓말인 줄 알았거든요.’

그녀처럼 좋은 드레스를 입은 여자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건넨 말이었다. 가방에서 금화 몇 개와 종잇조각을 꺼내어 테이블 위에 올린 여자가 말을 이었다.

‘아시겠지만…… 품위 없는 광고였잖아요. 싸구려 같고.’

모욕을 주기 위한 말이 분명했지만 타격은 없었다. 틀린 말이 아니었기에. 한 마디를 더 남긴 여자가 소리 없는 걸음으로 공간을 빠져나갔다. 약혼자의 뒷조사를 위해 블리스를 찾았지만 여자는 결코 저속해지지 않았다. 혼자 남아 다시 장갑을 착용한 블리스가 여자가 남기고 간 것들을 바라보았다. 테이블에 올려진 것 중 블리스가 취할 수 있는 것은 종이 하나 뿐이었다.

조각난 신문을 들고 양아버지를 찾은 밤, 양아버지는 더러운 신문지를 받아서 들지도 않은 채 눈으로만 아는 척 했다. 왜 한참 전의 신문을 들고 왔느냐는 물음조차 하지 않았다. 블리스가 종이를 내밀고 움직이지 않자 못마땅한 듯 한숨을 푹 내쉬었다.

‘너를 인식시키기 위해 한 일이었으니까. 왜, 커튼을 다시 걷는 게 좋겠니?’

블리스는 고개를 저었다. 양아버지의 뺨에 입을 맞추며 그냥 모자를 쓰고 싶을 뿐이라고 말했다. 그분들도 제 얼굴을 보고 싶지 않을 거예요. 중얼거리는 말에 양아버지는 웃으며 블리스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기만 했다.

‘쓸 수 있는 건 전부 사용하는 게 똑똑한 거란다.’

굿나잇 키스를 되돌려 받지도, 허락도 받지 못한 채 되돌아온 방에서 블리스는 천을 찢었다. 여자의 말이 계속 귓가에 머무는 것 같았다.

‘그렇게 살면 행복한가요?’

창문 아래로 길게 천을 늘어트리고 묶으려는 순간이었다. 나무 아래로 무언가 그림자가 흔들리는 게 보였다. 나뭇가지가 기형적으로 뒤틀려 있었고, 그림자는 양옆으로만 움직였다. 머리로는 인식했다. ‘저건’ 그림자가 아니라고.

천을 회수할 생각도 못 한 채 아래층으로 달려갔다. 그 후의 일은 뒤틀린 나뭇가지만큼 비현실적으로 흘러갔다. 검은 천으로 가려진 무언가가 마차에 실린 채 사라졌고, 블리스 방의 창문엔 못이 박혔다. 천은 잘게 조각난 채 쓰레기통에서 발견되었다.

“브리.”

양아버지가 부르는 애칭은 늘 불길한 울림을 주었다.

“이걸 한 번 읽어주겠니?”

시계를 내밀며 읽어달라는 말의 의미는 명확했다. 블리스는 장갑을 벗었다. 헐거운 시계는 손목이 아닌 손바닥 위에 자리했다.

‘네가 나를 죽인 거야.’

처음 마주한 타인의 악의는 아니었다. 하지만 최초의 살인이었다. ‘피해자’는 치밀하게 모든 것을 준비했다. 죽기 직전까지 시계를 붙잡고 블리스를 향해 말을 건넸다. 너는 이걸 볼 수밖에 없다는 듯이. 그리고 나의 죽음은 너로 인한 것이라고. 끊임없이. 과거에 새겨지도록.

‘너는 살인자야. 나를 죽게 만든.’

비밀이 있는 사람들에게 블리스의 존재는 마치 재앙과도 같았다. 비밀을 알기 위한 사람들은 돈을 내면 그만이지만, 비밀을 숨기고 싶은 사람들은 더 큰 대가를 치러야 했다.

그 대가가 목숨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블리스는 그날 처음으로 인식했다.

결국 능력은 그녀를 빠르게 무너트렸다. 다시 타오르기 시작한 불꽃은 블리스를 잠식했다. 그녀는 언제까지 타올라야 제 몸을 부술 수 있을지 궁금했다. 왜 그녀의 목숨은 이렇게나 어려운지. 그 사람은 고작 몇 번의 흔들림 끝에 영영 눈을 감지 않았는데.

게다가 피해자는 그 한 사람만이 아니었다. 죽음은 그들에겐 그렇게도 쉬웠다. 양아버지는 이제 그림자 속에 숨어서 찾아오는 사람들에게만 문을 열었다. 그게 피해자를 줄일 수 있는 길이라는 듯이.

그래야 블리스가 자결하지 않을 테니까.

어느 순간 그녀는 제 머리가 고장 났다는 걸 깨달았다. 침대 위에서 눈을 감았는데, 눈을 뜨니 손끝에 피를 흘리며 닫힌 창문을 긁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방 안에 그녀를 조금이라도 위협할 수 있는 물건들이 점점 사라지기 시작했다. 능력을 사용하고 온 날이면 흐느껴 울다가 계단 위에서 잠들기도 했다. 양아버지는 그녀의 방을 1층으로 옮겼다.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나무판자로 막혔다.

‘몽유병을 앓고 있는 것 같구나.’

제 병증이 단순한 단어로 정의될 수 없다는 걸 알았지만 블리스는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양아버지가 내미는 약을 받아 삼키면 밤이 사라졌다. 평온한 일상이 다시 찾아왔다. 능력을 쓰고, 사람을 만나고, 약을 먹었다.

리처드 스털링은, 그 남자는.

그림자에 숨지 않은 채 블리스를 찾은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녀를 먼저 평가한 채 찾아오지 않은 유일한 사람이기도 했다.

그의 시선은 그녀의 가치가 아닌 내면을 탐색하고 가늠하는 듯했으며, 그녀의 경계를 느낀 듯이 친절한 미소를 입가에 머금고 있었다.

“두려운가요?”

대화의 시작을 그렇게 여는 것도 그가 처음이었다.

“……아니요.”

“떨고 계시기에.”

그녀의 손에서 부스러진 생명을 본 후로 생긴 증상이었다. 블리스는 장갑을 마저 벗지 못한 상태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럼 오늘은 그냥 대화만 나누겠습니까.”

그녀의 하루를 산 남자가 먼저 꺼낸 말이었다. 금화의 무게를 아는 탓에 블리스는 그가 의자 위에 투구를 내려놓고 편하게 자세를 취하는 걸 그저 지켜보았다.

“그것조차 싫다면야.”

경계가 누그러지지 않은 걸 느꼈는지, 그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내려놓았던 투구를 써 얼굴을 가리려고 했다. 정말 시간을 버려도 상관없다는 태도였다.

“……돈을 내셨잖아요.”

“그랬죠.”

“그런데 왜……?”

“글쎄요. 미움받고 싶지 않아서?”

혼란스러운 망막 위로 그의 미소가 맺혔다.

“제가 예측을 잘 하는 편이라.”

“……각오는 되어있으니 빨리 끝내고 나가시죠.”

심호흡을 내쉬며 장갑을 벗자 유독 흰 피부가 드러났다. 마른 피부 위로 핏줄과 뼈마디가 툭툭 튀어나와 있어 보기 싫음에, 그녀는 손을 내밀었다가 주먹을 쥐어 숨겼다. 그가 움직이지 않고 그녀의 손만 바라보고 있었으니까.

“과거를 보는 능력이라고 들었는데.”

“네.”

“원래 그랬습니까?”

“……무슨 의미로 묻는 건가요.”

“학습된 것이라면 방법이 궁금하니까요.”

“배워서 되는 것이었다면…… 제가 선택할 수 있었겠지요.”

말하며 블리스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드레스 자락이 바닥을 스치는 소리가 공간을 채웠다. 그의 앞에 서자 리처드가 의아한 듯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내내 거리를 둔 채 마주 보고 있었던 탓에, 블리스는 이제야 그의 두 눈을 똑바로 볼 수 있었다. 그의 눈이…… 그녀처럼 서로 다른 색을 띄고 있었다. 타인이 보는 그녀도 그럴까. 바다 위에 나무가 자라난 듯 보이는 그의 눈처럼. 잘못된 장소에 뿌리내리고 만… 그래서 더욱 아름다운.

블리스가 저를 눈으로 읽어내리고 있자 리처드는 눈부신 미소를 얼굴 가득 그려냈다.

“제가 무릎이라도 꿇어야 할까요? 가게 앞에서 운명을 노래하는 얼간이처럼.”

“……아뇨. 한다면 제가 해야겠죠.”

그가 손을 내어주지 않으니 그녀가 잡으러 갈 수밖에. 드레스 자락이 바닥 위로 퍼져나갔다. 몸을 낮춘 그녀가 정말로 한쪽 무릎을 꿇자 당황한 기색으로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런 얼굴도 할 수 있는 사람이었나.

“일어나세요.”

리처드가 블리스의 팔을 잡고 일으켰다.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블리스가 리처드의 손을 바라보았다.

“과거를 보여주러 오셨잖아요.”

“그랬습니다.”

“그런데 왜 저를 막죠?”

순수한 의문이었다. 정말, 그의 의중을 알 수 없었으니까.

“제게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 그것만 존재하는 건 아니니까요.”

블리스는 입을 다물고 그를 응시했다. 그는 블리스의 표정을 보고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그러니까 단순하게 말하자면.”

“…….”

“그렇게까지 당신의 능력이 간절하지 않다는 말입니다.”

문을 열고 들어온 모두가 블리스의 손을 원했다. 의문을 해소하고자 했고, 그리운 걸 되찾고자 했다. 달리 방법이 없어 그녀를 찾아오는 사람들 뿐이었다. 내내.

“……여전히 모르겠네요.”

“무엇이 말입니까.”

“그러면 왜 저를 찾아온 거죠?”

“쉽게 찾을 수 있다면 기꺼이 뭐든 지불할 수 있었으니까요.”

“그럼 제 손을 잡으세요.”

흐린 조명 아래 블리스의 맨손이 펼쳐졌다. 뼈마디가 드러난 마른 손이 그를 유혹했다. 나는 당신의 길이 될 것이고, 당신은 그 길 끝에서 원하는 것을 쟁취할 수 있으리라는 확신이 꼿꼿한 손끝에 담겨있었다. 하지만 리처드는 여전히 그녀의 손을 잡으려 들지 않았다. 조심스러운 몸짓으로 그녀를 피해 옆에 놓아두었던 투구를 들 뿐이었다.

“……찾으면 오늘의 만남이 마지막이겠죠.”

“달리 더 찾을 게 없다면요.”

“이후의 만남이 그저 당신을 찾기 위해서라면. 제게 문을 열어줄 수 있습니까?”

“……왜요?”

그녀의 물음에 그는 그저 짙게 미소 지을 뿐이었다.

“글쎄요.”

침묵 끝에 저 자신도 그 답을 알지는 못한다는 듯이 대답했지만, 그녀도 그도 알고 있었다. 분명한 정답이 존재한다는 걸. 다만 드러내지 않았을 뿐.

“……문을 여는 건 저의 소관이 아니에요.”

“그럼 우린 다시 만날 수 있겠군요.”

그녀와 그가 ‘우리’라는 단어로 함께 묶일 만큼 가까운 사이였던가?

“다음이 마지막이기를 기도해야겠군요.”

“아, 신을 믿나요?”

“아니요.”

그녀는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신은 믿지 않았다. 그녀의 기도는 제 뇌관에 향하고 있었으니까. 빨리 터져버렸으면 좋겠어. 내일이 오지 않았으면 좋겠어. 사라진 밤처럼, 태양을 맞이하는 일이 없었으면.

“그건 저와 같네요.”

“……그런가요.”

“저도 신을 믿지 않기에.”

“…….”

“신이 있다면, 제가 당신을 찾을 일도 당신이 저를 만나는 일도 없었어야죠.”

블리스가 물끄러미 제 손을 바라보았다. 많은 사람들이 축복이라 말하지만 그녀에게는 저주 같은 능력이었다. 평범함에서 멀어진 인생은 언제나 가시밭길이었다. 어머니도, 아버지도, 동생도……. 그녀의 가시에 찔려 피를 흘리며 떠나갔다.

상처받는 일이 가장 두려웠다. 하지만 그녀는 남을 상처입히는 방법밖에는 몰랐다. 가시에 다치지 않기 위해 걸음마를 새로 배우는 아이처럼 걸었고, 사람을 마주할 때면 말을 고르고도 심호흡을 두 번 내쉰 뒤에야 말을 건넬 수 있었다.

어렸을 때는 넘어지는 일이 가장 아팠는데 자라고 나니 감정이 제일 아팠다. 상대가 그녀를 베고 그녀가 상대를 할퀴고. 어느 순간 거울을 보니 목전에 닿아있는 칼날의 손잡이를 잡고 있는 건 자기 자신이었다.

모든 상처의 원인이 자기 자신이라는 건… 쓸쓸하고 아픈 일이었다. 아무도 그녀와 관계를 쌓아나가지 않았다. 모든 만남은 일회성이었다. 그래야 덜 아플 수 있었다.

“신이 없기에 우리가 이렇게 마주 보는 거 아니겠습니까.”

그가 다시 한번 그녀와 자신을 한 곳에 묶었다. 지나치게 친밀한 단어였다. ‘우리’라니. 양아버지와 가족으로 엮인 것도 아직 익숙해지지 않았는데.

“……이제 가주었으면 좋겠는데요. 손을 잡지 않을 거라면.”

경계심이 들었다. 그는 위험하다. 리처드 스털링은, 블리스 케스윅에게. 그의 분명한 의도를 그녀는 알아차리지 못할 테니까. 결국 다치는 건 그녀가 될 것이고.

“그대가 원한다면.”

그녀는 더 이상… 타인으로 인해 아파하고 싶지 않았다. 이미 고통은 충분했다.

“블리스 양.”

“……네.”

“다시 뵙죠.”

그는 예고를 남기고 떠나갔다. 검은 그림자가 그를 집어삼키는 모습을 보며 블리스가 테이블에 놓아둔 장갑을 착용했다. 그리고 불현듯 깨달았다. 오늘은 그녀가… 타인의 과거를 보지 않은 날이라는 것을.

리처드 스털링은 그렇게 그녀에게 유일로 남아버렸다는 것을. 그리고 그녀가… 그의 다음 방문을 기다리게 되었다는 것까지도.

말과는 다르게 그는 한참 동안 블리스를 찾아오지 않았다. 블리스는 매번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들을 확인하고 낙담하는 과정을 거쳐야 했다. 대지에 깊게 뿌리내린 나무가 수맥을 찾지 못해 시들어가는 것처럼. 블리스는 이유 모를 열병을 앓았다.

“오랜만입니다.”

그래서 그가 다시 얼굴을 보인 날. 그녀는 흐르는 눈물을 참지 못하고 흘려보냈다. 잡아본 적 없는 손, 닿은 적 없는 사람.

“많이 기다리셨던가요.”

소리없이 흘러내리는 슬픔을 그는 그저 관망했다. 달래주지도, 닦아주지도 않은 채.

그 정도로 가깝지 않은 사람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어느새 블리스에게 ‘우리’하면 떠오르는 사람이 되었다. 나와 너로 분리된 것이 아닌.

“잘 견디셨습니다.”

“…….”

어째서.

“잘 버티셨어요.”

지극히 먼 타인에 불과한 당신이.

“살아줘서 고마워요.”

다시 그녀를 살게 만드는지.

그녀는 그가 검을 드는 기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칼이 언젠가 그녀의 숨을 거두리라는 것도.

그냥. 알게 되었다. 그녀는 가져본 것에 대한 갈망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게 무너진 순간 얼마나 절망하게 되는지. 모든 관계는 이어지기 전이 아름다운 법이라는 것도. 서로가 서로에게 가시가 되고 칼날이 되어가는 과정이 얼마나 쓸쓸하고 아픈지도.

그걸 알면서도 그가 남긴 단어를 가슴에 엮었다.

불꽃은 다시 연기를 남기고 사그라들었지만 뇌관은 여전히 그녀의 심장에 자리하고 있으니, 이제 그녀의 숨통을 쥔 것은 그녀가 아니라 리처드가 되리라는 것도.

흔들리는 뇌관을 품고 그녀는 언제까지 살아갈 수 있을까. 하나의 계절을 지나 모든 것을 잃었던 계절이 찾아오면. 미래는 그녀에게 당연하게 주어진 것이 아니었고, 블리스는 뇌관과 함께 자라나는 아이였다.

그 와중에 그는 얼마나 아름다운지. 내면이 위태롭고 엉망이 되어갈수록 세상은 더없이 빛이 나고 있었다.

서럽고 억울한 마음보다 그 빛에 눈이 멀었다. 사라진 줄 알았던 감정들이 일시에 풀려나, 그녀는 주체할 수 없이 울고 말았다. 뇌관이 터지는 게 세상에서 가장 무서웠던 그녀가. 어떤 진리를 깨닫는 순간이었다.

절망의 끝에서 모든 것이 시로, 글로 변하기도 한다는 것을. 그리고 그것은 세상이 그녀를 사랑하는 방식이었다.

“보고 싶었습니다.”

그게 리처드 스털링이 블리스 케스윅을 살리는 방식이었다.

“……과거를.”

“네.”

“당신을 보여주세요.”

흐느끼는 그녀를 품에 안은 리처드가 그녀의 머리카락 위에 짧게 입을 맞췄다.

“허락하겠습니다. 내 과거를.”

“처음부터 끝까지?”

“전부.”

블리스의 손을 감싼 장갑을 벗겨낸 그가 깍지를 껴 그녀의 손을 단단하게 붙잡았다. 여전히 흘러내리는 눈물은 입술로 훔쳐냈다.

“당신은 내 과거를 가지고, 난 당신의 미래를 얻는 겁니다.”

“드릴게요. 전부.”

어차피 그가 아니었다면 바스러질 숨이었으니 아깝지 않았다. 블리스는 눈을 감고 그의 과거 속을 유영했다.

“블리스. ‘우린’ 완벽하게 서로를 위해 존재할 테니까. 하나만 기억하시길.”

“……어떤?”

“신은 없다는 걸.”

흐려진 시야 사이로 리처드의 얼굴이 일그러져 보였다. 그가 블리스를 안아 소파에 눕히는 게 느껴졌다. 마치 밤처럼, 그가 남은 손으로 블리스의 두 눈을 가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