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ichBli · Abyss3화 — 경성–이름짓기

CHAPTER 3

경성–이름짓기

RichBli · 약 8분 분량 · 2026.10.04

작가의 말

구한말 경성 배경

Richard Sterling

리, 처, 드. 스, 털, 링.

그가 고풍스럽게 흘려 쓴 영어 밑으로 이수의 투박한 한글이 얹어졌다. 한 글자씩 글자를 연필로 누르며 발음하자 리처드가 웃으며 이수의 말을 따라 했다.


- “이게 맞아?”

- “한글로는요.”


흠,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제 이름을 읽었다. 영어로 된 제 이름을 한글로 발음하는 이상한 풍경이었지만 이수와 리처드에게는 자연스러운 모습이었다.

특별한 태생 탓에 이수는 영어로 듣고 말하는 건 능숙했으나 그걸 문장으로 옮기는 데엔 서툴렀다. 반면 그는 조선어를 거의 모르고 있었다. 따라서 이수는 학교가 끝난 뒤 리처드의 상점에 들러 그에게 영어 작문을 배우고, 한글을 알려주는 일상을 보내게 되었다.


- “네 이름도 적어줘.”


그의 말에 이수는 한글로 쓴 그의 이름 아래 제 이름을 가지런히 적어 내려갔다.

반, 이, 수.


- “무슨 뜻이야?”

- “그냥 이름인걸요.”

- “조선인은 이름에 뜻을 담는다고들 하던데.”


그의 말에 이수가 한글로 적은 제 이름을 바라보았다. 한자를 쓰는 건 어렵지 않았다. 학교에서 제일 먼저 배운 게 그거였으니까.

潘利水

천천히 적어 내린 이수가 저를 가만히 지켜보는 리처드의 눈을 마주 바라보았다.


- “물이 잘 통하게 만든다는 의미에요.”


이수는 그것보다는 다른 뜻으로 제 이름이 더 많이 불리곤 한다는 걸 숨겼다. 학교에 도착하면 이수의 책상 위에는 언제나 많은 낙서들이 그려져 있곤 했다. 외지인, 색목인, 그리고…… 二竪.


- “발음해 줘.”

“반, 이, 수.”

“이수.”


대뜸 그가 내뱉은 이름에 이수는 몸을 움찔 떨었다. 리처드는 절대, 결코 이수를 ‘악마’로 부르지 않겠지만…… 학교를 떠올리고 있던 탓에 몸이 반응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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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르기 쉬워서 마음에 들어.”

- “……다행이네요.”


이수, 이수. 리처드는 여러 번 반복해서 이수를 불렀다. 그의 부름이 대답을 요구하고 있지 않다는 걸 알기에, 이수는 한자 위를 연필로 긁어 지우기만 했다.


- “뜻이 마음에 안 들어?”

- “그냥, 제 이름이…… 싫어서요.”

- “왜?”


이런 이름이 아니었다면 그런 별명을 얻진 않았을 테니까.

입을 타고 퍼지는 소문들은 참 가볍고 잔인했다. 선교사인 아버지가 제 존재 때문에 도망쳐 떠나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이나, 세상을 절반 나눠서 보는 듯한 눈이 징그럽다거나. 그러니 어머니가 정신을 놓지 않았겠느냐는 그런 말들이 이수를 二竪로 만들었다. 쟤한테 가까이 가면 병이 옮는대. 역병에 걸려 눈이 멀고 아주 고통스럽게 죽는대. 허황한 말들이 사실처럼 여겨지게 되는 덴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이수는 어느 순간부터 한쪽 눈을 가리고 등교했다. 소문은 그래도 가라앉지 않았다. 수군거림을 등에 업고 집으로 돌아가면 어머니가 돌아 앉아 동생을 어르고 있었다. 소문은 집 안에도 퍼졌다. 어머니는 언제부턴가 방문을 걸어 잠그기 시작했다. 이수는 집에서도 二竪가 되었다.

그런 이수를 온전히 받아들여 준 곳은 여기 뿐이었다. 이수와 마찬가지로 색목인인, 형형색색으로 물들어 있는 이들이 운영하는 상점. 배를 타고 온 다양한 서역 물건이 가득한 곳은 언제나 문을 열어둬 이수의 방문을 거절하는 법이 없었다.


- “그냥요.”


그들이 이수를 불편하게 여기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이수는 웃는 얼굴을 억지로 만들면서, 한글로 적힌 제 이름까지도 지워냈다.

어차피 그들은 떠날 사람들이었다. 이수의 아버지처럼. 그들에게 자신의 존재는 그냥…… 어느 동양에서 만난 이질적인 아이에 불과하겠지. 스쳐 지나갈 인연에 목을 매는 건 의미 없는 일이었다.

리처드가 제 손을 따라 지워지는 이름을 바라보는 게 느껴졌다. 이수는 연필이 다 닳을 때까지 이름을 지우고, 지웠다.


- “공부 중?”

- “어.”

- “나 이수한테 부탁하고 싶은 거 있는데.”

- “나중에.”

- “뭔데요?”


미요시는 리처드의 대답을 무시한 채 이수의 손을 잡았다. 리처드의 못마땅한 시선이 미요시에게 단단히 붙잡힌 이수의 손으로 향했다.


- “조선 이름을 지어줘. 조선인들이 내 이름을 들으면, 아무것도 안 사고 나가.”


아……. 이수는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처연한 얼굴을 한—리처드는 늘 속지 말라고 하긴 했지만— 미요시를, 게다가 그런 이유라면 거절할 수 없었다. 이번만큼은 리처드 역시 눈을 감아주려는 듯, 일어나 미요시가 이수의 옆에 앉도록 자리를 비켜주었다. 사르르 웃은 미요시가 이수의 손을 놓아주었다. 이수는 종이를 넘겨 다시 백지를 눈앞에 두었다.

상점 문에 달린 종이 울리는 소리가 맑게 한 번 울리고, 이수의 눈에 리처드가 밖에 나가 담배에 불을 붙이는 모습이 보였다.


- “가끔 피우더라.”

- “……아, 네.”


이수는 붉어진 얼굴을 숨기려 애썼다. 종이 위에 여러 글자를 적으면서, 미요시가 제 마음을 알아차리지 못했기를 기도했다.


- “무슨 뜻을 담고 싶어요?”

- “이수가 추천해 줘. 난 잘 모르니까.”


봄을 담은 머리카락, 보석이 담긴 눈. 솔직히 말하면 이수는 리처드보다 미요시가 더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둘 다 조선에 어울리지 않는 외형을 가지긴 했지만 리처드가 선이 굵은 남자다운 느낌이라면, 미요시는 처음 본 순간 여자라고 착각할 만큼 예뻤으니까.


“……미현상.”

- “무슨 뜻이야?”

- “절대 변하지 않는 본질 같은 말이에요. 누구나 당신을 보면 떠올릴 말.”


아름다운 現象.

미요시는 발음이 좀 어렵네, 하며 웃었다. 한글로도, 한자로도 적어달라는 미요시의 말에 종이에 열심히 글자를 적는데 머리 위로 그림자가 졌다.


- “내 이름도.”


어느새 리처드가 이수의 등 뒤로 다가와 있었다.


- “나도 네 이름을 지었으니까.”


그의 말에 글자를 적던 손이 멈췄다. 미요시가 한숨을 내쉬며 일어나 의자를 비워주었다.


- “너무 매달리는 거 아니야? 매력 없게.”

- “시간이 없으니까.”

- “……뭐, 그래. 방해꾼은 사라질게.”


다시 옆자리를 차지한 리처드가 이수를 보며 웃었다. 리처드는 미요시의 흔적을 뜯어 옆으로 대충 치운 뒤, 이수가 잡았던 연필을 가져가 종이에 무언가 그리기 시작했다.

Bliss Keswick


- “네 영어 이름. 언젠가 서역에 가서 아버지를 만나고 싶다고 했잖아.”


리처드가 선물한 이름에 이수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 “이수랑 잘 어울린다고 생각하는데.”

“…….”

- “마음에 들어?”


조심스러운 기색으로, 그가 이수를 살피고 있었다.


- “왜 말이 없어.”


그야, 울 것 같으니까.

그저 담배를 피우고 있는 줄 알았는데. 리처드는 창 너머로 이수와 미요시가 이름을 짓는 모습을 내내 지켜보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는 이수의 이름을 지어 왔다.


- “네 지금 이름도 좋지만, 필요할 것 같아서.”


그게 마치, 바보 같지만. 나중에 그가 서역으로 떠날 때…… 이수도 함께 가자는 의미처럼 느껴졌다. 그게 아니더라도 나중에 서역에 도착한 이수를 가장 먼저 알아차리기 위해서.

그가 마련한 장치였다.


“……왜 그렇게 나를 신경 써요?”


나는 그곳에서도, 지금 당신에게도 이방인일 텐데.


- “너는 가끔 내가 네 말을 못 알아들었으면 하는 것 같아. 그걸 모르지 않는데, 그래도 답답한 건 어쩔 수 없네.”

- “……마음에 들어요.”

- “응, 속아줄게.”


리처드가 웃었다. 안도를 담아서.

그 순간 이수는 그의 이름을 정할 수 있었다.


“이채도.”

- “응?”

- “당신 이름이요.”


빛이 그의 얼굴을 스칠 때였다. 이수는 저와 똑같은 위치에서 같은 색을 내는 그의 눈을 똑바로 마주하고 있었다.

우리는 마주 볼 때 같은 온도를 가지는구나. 나는 비로소, 내가 가진 이방의 흔적을 당신으로 인해 좋아할 수 있게 되었구나.

문득 아쉬워졌다. 미요시가 아니라, 리처드의 이름을 가장 먼저 지어주었으면 좋았겠다고. 이름의 의미를 궁금해하는 리처드에게 입을 다물고 웃어 보이면서, 이수는 그렇게 생각했다.

나는 당신 때문에 울겠구나.

사랑할 수 있게 된 색을 이름으로 주며 마음도 줘버린 탓에. 결국 離愁를 겪겠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