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라니 · 호이5화 — 역전된 사냥

CHAPTER 5

역전된 사냥

고라니 · 약 4분 분량 · 2026.09.30


"계십니까. 절 구해주신 분을 꼭 찾아서 인사드리고 싶어 경찰분들과 함께 왔습니다. 문 좀 열어주시겠어요?"

인터폰 화면 속 남자의 얼굴은 이틀 전보다 훨씬 투명하고 선명했다. 나는 침을 삼키며 가면을 고쳐 쓰고 문을 열었다. 동석한 경찰들은 나를 '의인'이라 부르며 대충의 경위를 묻고는, 남자의 간곡한 부탁으로 감사 인사를 나눌 시간을 주겠다며 먼저 복도 아래로 내려갔다.

문이 닫히고, 거실에 단둘만 남게 된 순간. 휠체어에 앉아 있던 남자의 얼굴에서 '은인을 향한 미소'가 기분 나쁠 정도로 부드럽게 지워졌다.

"경찰서에 가기 전에, 좋게 넘어가고 싶어서요."

남자는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조용히 읊조렸다. 그 예의 바른 어조가 가시가 돋은 채 뺨을 긁는 것 같았다.

"실수로 오발 사고를 낸 거로 해 드릴 테니까, 합의금 1억 주시죠. 그게 서로 깔끔하지 않겠습니까?"

내 척추를 타고 냉기가 흘러내렸다. 놈은 알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자기를 쏜 범인이 나라는 걸, 그 투박한 엽총의 반동을 느꼈던 내 어깨를, 모든 걸 다 알고 나를 옭아매러 온 것이었다. 하지만 평범하게 살아온 나에게 1억이라는 거금이 있을 리 만무했다.

나는 팔짱을 낀 채 놈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머릿속 계산기는 차갑게 끝이 났다. 나는 침을 한 번 삼키고, 내 식대로 말을 던졌다.

"돈 없어요. 그러니까 몸으로 때울게요."

"……몸으로요?"

남자의 미간이 묘하게 좁아졌다. 뜬금없는 제안에 당황할 법도 한데, 놈은 이내 내 속내를 꿰뚫어 보듯 입꼬리를 올렸다.

"그럼, 제 비닐하우스에서 먹고 자면서 무임금 노동이라도 하겠다는 뜻입니까?"

"못 할 것도 없죠."

내 대답에 남자는 잠시 침묵하더니, 휠체어 바퀴를 굴려 내 코앞까지 바짝 다가왔다. 핏기가 가신 그의 가느다란 손가락이 내 옷깃을 스치듯 건드렸다. 소름이 돋았다.

"사실 저, 이 근처 읍내에서 농사짓는 사람입니다. 그날 산에 간 것도 멧돼지 잡으러 간 게 맞고요. 엽사들이 멧돼지 쫓아내면, 밑에서 몽둥이 들고 기다리다가 잡으려고 그랬는데…… 엉뚱하게 그쪽 총에 맞았네요."

남자는 결코 산속의 가련한 고라니가 아니었다. 놈 역시 짐승의 피 냄새를 쫓던 사냥꾼이었다.

"좋습니다. 마침 일손도 부족했는데, 당분간 우리 비닐하우스에서 지내면서 일하죠. 노동력으로 1억 차감하는 거로 하겠습니다. 어떻습니까?"

남자의 동의는 어딘가 비합리적이었고 기묘했다. 하지만 그의 짙은 눈동자를 마주한 순간, 나는 직감했다. 놈이 진정으로 원하는 건 돈이 아니었다. 이틀 전, 어둠과 안개로 축축했던 바위 동굴 안에서 서로를 껴안고 체온을 나누던 그 순간부터— 남자는 나에게 욕망을 느끼고 있었다. 나를 자기의 거친 영역으로 끌어들여 영원히 묶어두려는 비틀린 집착이었다.

그 기이한 거래가 성사된 후, 나는 놈의 읍내 비닐하우스로 거처를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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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낮의 비닐하우스 안은 푸르스름한 비닐을 투과한 햇빛으로 기분 나쁘게 후끈거렸고, 사방에 고인 눅눅한 흙냄새가 진동했다. 다리를 절뚝거리는 남자는 비닐하우스 저편에서 나를 가만히 관찰했고, 나는 놈의 시선 아래서 묵묵히 흙을 파고 허리를 숙였다.

"동작이 느리네요. 1억 갚으려면 턱도 없겠는데."

남자가 의자에 걸터앉은 채 턱을 괴고 나를 빤히 쳐다보며 낮게 비웃었다. 목소리엔 여전히 높낮이가 없었지만, 그 무덤덤한 조롱이 살갗을 찌르는 것 같았다.

그 순간, 온몸의 털이 곤두서며 기이한 감각이 몰아쳤다. 숲속에서 맹수에게 쫓기며 갈팡질팡 도망치던 야생동물의 심정. 어두운 밤길, 차 헤드라이트 불빛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얼어붙어 버린 가련한 신세.

그날 내가 쏘았던 '고라니'의 영문 모를 공포와 무기력함이, 이제는 남자의 영역에 스스로 걸어 들어와 갇힌 나에게로 고스란히 옮겨오고 있었다. 고라니는 죽지 않았다. 그저, 사냥꾼의 탈을 쓰고 내 눈앞에서 나를 완벽하게 사냥하고 있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