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라니 · 호이2화 — 살려줄까

CHAPTER 2

살려줄까

고라니 · 약 5분 분량 · 2026.09.30

터널 위를 넘어 야산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갈수록, 공기는 축축하고 비릿해졌다.

사방은 온통 영화 속 한 장면처럼 가라앉은 이끼색과 푸르스름한 회색빛 안개로 가득 차 있었다. 달빛마저 웅덩이에 고인 썩은 물처럼 탁하게 흩어지는 밤이었다. 질척이는 진흙 밟는 소리와 내 거친 숨소리만이 고요를 찢었다.

등에 업힌 남자의 상처에서 흘러내린 피가 내 패딩 점퍼를 타고 흘러내려 끈적하게 엉겨 붙었다. 비린 혈향이 코끝을 찔렀지만, 나는 소매로 콧물을 쓱 닦아낼 뿐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평소의 나였다면 칠칠치 못하게 옷을 버렸다며 짜증을 냈을 텐데, 지금은 그럴 겨를이 없었다.

마침내 커다란 기암괴석 아래, 수풀에 가려진 좁은 바위 틈새가 눈에 들어왔다.

나는 남자를 바위 바닥으로 사정없이 내팽개치듯 내려놓았다. 털썩. 둔탁한 소리와 함께 남자의 고개가 꺾였다. 어깨의 감각이 마비된 듯 얼얼했다. 나는 숨을 몰아쉬며 흙바닥에 주저앉아, 허벅지를 탁탁 치며 터져 나오려는 비명을 억눌렀다.

'울 시간 없어. 정신 차려.'

스스로의 뺨을 세게 한 대 때려 이성을 붙잡았다. 그리고 냉철하게 심호흡을 한 뒤, 남자의 상반신 위로 몸을 숙였다. 지독하게 차가운 밤공기 사이로 남자의 입에서 가느다란 입김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아직 살아있다.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흔적을 지우는 것이었다.

나는 떨리는 손을 억누르며 남자의 주머니 안으로 손을 찔러 넣었다. 원단의 감촉이 손끝에 닿았다. 주머니를 뒤적이자 폰이 잡혔다.

침을 삼키며, 전원 버튼을 길게 누르고 배터리가 나갈 때까지 스마트폰을 바닥에 내리쳐 부숴버렸다. 우지끈하는 소리와 함께 사방이 다시 암전되었다. 푸르스름하게 잔상이 남았던 망막 위로, 잉크를 쏟아부은 듯한 야산의 어둠이 진득하게 감겼다.

이제 이 남자의 신원을 증명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적어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나는 부서진 잔해를 축축한 흙 속에 파묻고, 숨을 죽인 채 남자의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짙게 가라앉은 이끼색 안개 사이로 가느다란 입김이 유령처럼 피어오르고 있었다.

"……춥다. 씨발."

암전된 어둠 속에서 짓눌리듯 터져 나온 남자의 거친 욕설에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했다. 평소 세상만사 태연자약, 웬만한 일에는 눈 하나 깜짝 안 하던 나였지만, 이 순간만큼은 심장이 갈비뼈를 뚫고 나올 것처럼 폭주했다.

반사적으로 놈의 품에서 떨어져 나가려 했지만, 내 외투를 움켜쥔 남자의 악력은 허벅지를 다친 사람이라곤 믿기지 않을 만큼 억셌다. 손가락이 내 옷자락을 파고들었다.

들켰다. 내가 자기를 쏜 범인이라는 걸 알아챈 게 분명하다. 온몸의 세포가 얼어붙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어진 남자의 밭은 숨소리와 초점 없는 눈동자를 본 순간, 내 서늘한 이성이 다시 돌아왔다. 놈은 통증과 오한으로 부르르 떨며 나를 제대로 보지도 못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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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어디야. 당신 누구야?"

"……."

"아까…… 다리에 총알이 박혔었는데…… 윽!"

남자는 거칠게 앓는 소리를 내며 제 허벅지를 더듬었다. 숲이 너무 어두웠던 탓일까, 아니면 갑작스러운 충격 탓일까. 남자는 누가 자신에게 총을 쐈는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 내가 자기를 들처매고 터널 위 숲길을 넘어올 때 잠깐 의식이 가물가물하게 돌아왔던 모양인데, 그저 자신이 조난당했고 내가 구해준 생명의 은인이라 착각하는 눈치였다.

천운이었다. 무서우리만치 차가운 안도감이 척추를 타고 흘러내렸다.

나는 떨리는 목소리를 꾹 누르고, 최대한 무덤덤하고 차분한 목소리로 거짓말을 뱉었다.

"나도 몰라요. 등산 왔다가 길을 잃었는데, 그쪽이 피 흘리며 쓰러져 있길래 일단 여기까지 끌고 온 거예요."

"지금…… 몇 시입니까……?"

"하필 손전등을 잃어버려서요. 핸드폰도 배터리가 나갔고."

남자의 미간이 기괴하게 좁아졌다. 이 상황이 의심쩍은 건지, 그저 밀려오는 고통 때문인지 분간이 가지 않아 입안이 바짝 말랐다. 질척이는 진흙 냄새가 코를 찔렀다. 나는 놈이 더 깊게 생각할 틈을 주지 않기 위해 서둘러 말을 덧붙였다.

"지혈은 대충 해뒀으니까 가만히 있어요. 날 좀 풀리면 바로 응급실에 데려다줄 테니까."

응급실이라는 단어에 남자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이내 버티기 힘든 듯 다시 스르륵 눈을 감았다. 거친 숨소리가 바위 구석으로 흩어졌다.

거짓말로 위기는 넘겼지만, 머릿속은 더 엉망진창으로 꼬여갔다. 날이 밝으면 정말 이 남자를 응급실에 데려다주어야 한다. 어둠 속에서 다시 갈라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갑자기 낯선 여자의 품에 안겨 있는 이 상황이 당혹스러울 법도 한데, 남자는 그럴 기력조차 없어 보였다.

산속의 칼바람은 잔인했고, 서로의 체온에 기대어 있는 것만이 유일한 온기였다. 남자는 내 패딩 자락을 약하게 쥐며 춥다는 듯 몸을 더 웅크렸다.

"……휴대폰 좀 빌려주실 수 있습니까. 연락할 곳이 있어서요."

"그쪽 폰은 진작에 방전됐어요. 제 것도 아까 확인하니까 겨우 20퍼센트 남았더라고요. 산속이라 기지국을 못 잡아서 금방 꺼질 거예요."

내 서늘한 거짓말에 남자는 힘없이 눈을 감았다. 무기력하게 처진 눈꺼풀과 하얗게 질린 입술을 보는데, 기묘한 감정이 요동쳤다.

갑작스러운 암전 속에서 차 헤드라이트에 치여 길 위에 고꾸라진 야생 고라니. 영문도 모른 채 피를 흘리며 깊은 야산 속으로 도망쳐야 하는 꼴이, 내 손으로 쏘아 맞춘 저 가여운 야생동물과 똑 닮아 있었다. 그리고 이 고라니를 완전히 내 편으로 만들어야만 내가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