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찬가 · 미르2화 — 손끝이 맞닿은 순간 (2)

CHAPTER 2

손끝이 맞닿은 순간 (2)

인간찬가 · 약 12분 분량 · 2026.10.05

아델은 명함을 손에 든 채 컴퓨터가 있는 방으로 향했다. 먼지 한 톨 없는 본체의 전원 버튼과 역시 멀끔한 모니터를 켠다. 로딩음과 기계장치 돌아가는 소리가 이어지더니 약 1분 후 컴퓨터가 켜졌다. 아델은 지체하지 않고 검색창을 열어 ‘레전드 연구소’를 입력하고 엔터키를 눌렀다.


404 ERROR Sorry We Can’t Find That Page!


이럴 줄 알았다. 클리셰적인 결과에 아델이 헛웃음을 내뱉었다. 이대로 드라마가 끝나버린다면 참 좋겠건만, 아델은 아직 무대에서 내려올 수 없었다. 멈춘 컴퓨터 대신 멋대로 켜진 프린터기가 인쇄물을 뽑아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델은 자리에서 일어난 뒤 프린터기로 나온 인쇄물을 천천히 살펴 보았다. 미로찾기였다.


이런 퍼즐은 사실상 마주친 순간 본능이 풀어버린다. 가령 미로찾기의 경우, 입구에서 출구가 아닌 출구에서 입구 방향으로 나가는 경우의 수를 따지면 순식간에 풀어버릴 수 있다. 바로 이렇게. 왜 이렇게 재미없는 걸 준비했을까. 방문을 열면 미로라도 펼쳐지려나. 그럴 리가 없지. 아델은 책상 옆에 푼 흔적 없이 깨끗한 종이를 내려놓고 천천히 방문을 열었다. 그에게는 일어난 직후 몸을 씻고 하루를 시작하는 습관이 있었다. 열린 방문 너머에는 당연하게도 평소의 집이 있었다.



씻고 옷을 갈아입은 아델은 확실히 번듯한 사회인처럼 보였다. 적어도 어젯밤의 신경증 환자같은 모습에선 확실히 벗어나 있었다. 기절잠이라도 잔 덕분이겠지. 아델은 속으로 포말하우트에 대한 감사함과 반감 섞인 미묘한 감정을 진정시키며 냉장고를 열었다. 전체적으로 텅 빈 냉장고 안에 붉은 사과 몇 알이 들어있는 게 눈에 띄었다. 아델은 자연스럽게 손을 뻗어 그 중 한 알을 집었고, 싱크대에서 가볍게 헹군 뒤 송곳니로 그것을 깨물었다. 막 양치를 한 입에 과일이 들어오니 쓰게 느껴진다. 하지만 그것에 먹는다는 행위를 그만둘 만큼의 구실은 없었다. 다른 생명이라곤 하나도 없는 집안에 아델의 사과 씹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려 퍼졌다.


그러던 중이었다. 바닥에 무언가 푸른 파편이 반짝이고 있는 게 보였다. 아델의 시선이 무심코 그것을 향해 자세히 들여다본다. 그리고,


눈을 마주친다.


그것은 순식간에 솟아올라 아델의 귀에 대고 속삭인다. ‘밖으로 나와.’ 그렇게 말한 그것은 아델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그의 허리를 휘감고는 순식간에 현관으로 이동했다. 문은 이미 열려 있었고, 아델은 뭐라고 대꾸하기도 전에 그 괴상한 무언가에게 떠밀려 백색의 공간 너머로 떨어지고 말았다.



눈앞에 온통 새하얀 정경이 펼쳐졌다. 보기에는 눈밭 같은데, 바닥이 매끈하고 딱딱했다. 아델은 주위를 살펴 보았다. 자신이 서 있는 방향 기준으로, 양옆과 뒷쪽에는 아무것도 없어 보였다. 오직 앞쪽, 저 너머에만 초록빛이 살짝 보일 뿐이었다. 그렇기에 그는 일단 그 쪽으로 가는 수밖에 없었다. 지금은 알 수 없었지만, 그가 이 공간에 떨어지고 나서 이상하다는 감각을 느낀 것은 이 공간에서 벗어난 후에야 벌어진 일이었다.


아델은 정원수가 가득한 길으로 들어섰다. 무언가 기시감이 들었다. 그래, 분명히 아까 프린팅된 그 미로다. 입구가 세 갈래로 갈라져 있는 걸 보니 70% 정도는 확신할 수 있다. 이제 아델에겐 좋은 일과 나쁜 일이 있었다. 전자는 이미 풀어본 미로라는 것, 후자는 그 시험지를 두고 왔다는 것. 아델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 말 있지 않은가. 몸이 좋으면 머리가 편하고, 머리가 좋으면 몸이 편하다. 아델은 어느 한쪽 뒤처지지 않게 뛰어난 축에 속했다. 그렇기에 항상 겪는 상황이 극단적이었다. 몸이 고생하고 머리가 고생하거나, 머리가 편하고 몸이 편하거나. 그 중에서도 아델은 후자의 상황을 선호했다. 할 수 있는 한 일에 앞장서지 않았다. 그런데 눈앞에 놓인 상황은 어쩔 수가 없었다. 머리를 쓰면 몸이 고생하고, 머리를 안 쓰면 몸이 뒤지게 고생한다. 아델은 마음속으로 저울질을 해 보았다. 역시 몸보다는 머리가 고생하는 편이 더 편하다. 그렇게 생각한 아델이 눈을 지긋이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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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이걸 부르는 방법이 있었다. 포토메모리 암기법이라고 하던가. 사실 아델에게 그건 이름붙일 필요조차 없는 자연스러운 기억 방식이었다. 세상의 그 어떤 순간이라도 아름다움이 존재할 수 있다고 생각한 예술가는, 자신이 본 모든 것을 강박적으로 기억했다. 그러는 과정에서 탄생한 기억법이다. 물론 덕분에 머릿속에 기억들로 잔뜩 압박되어서 그의 신경질적인 성격을 만들어내는 데 일조하긴 했다만. 이런 상황에선 유용한 일이었다.


그렇기에 목적지에 도달하는 건 쉬운 일이었다. 실제로 이곳이 목적지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미로 지도에는 별 표시가 되어있던 구역이니 여기가 맞겠지. 아델은 시야가 살짝 가려질 정도로 내려온 덩굴을 해치고 그 너머의 공간으로 향했다. 그리고 할 말을 잃어버렸다. 낮과 밤, 사계절이 공존하는 세상이 있었다. 그 아래 눈부실 정도로 새하얗게 빛나는 돔이 있었다. 아델이 반사적으로 한 걸을 내딛자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델은 슬쩍 고개를 돌렸다.


미형의 인간 남성이 서 있었다. 아니, 인간이 아닐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그는 잔잔한 파도처럼 굽이치는 머리카락과 매력적인 푸른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는데, 눈동자가 어찌나 일렁거리는지 그 방울이 바닥으로 뚝뚝 떨어져 종종 푸른 자국을 남기곤 했다. 그는 어젯밤처럼 한결같이 부드러운 말투로 아델을 맞이하듯이 팔을 내밀었다. 동시에 약간 의아하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지도는?”

아델은 잠시 멍한 표정으로 서 있다가 포말하우트가 말한 지도가 무엇인지 깨달았다.

“두고 왔습니다.”

포말하우트는 아델을 잠시 빤히 바라보더니 혼잣말로 ‘아하’라고 외치곤 무언가를 중얼거렸다. ‘요즘 인간들은 이 정도도 가능하구나’라는 말을 들은 것 같긴 한데, 아델은 아직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아들을 만큼 포말하우트를 잘 알진 못했다. 그렇게 아델이 이곳을 찾아온 방법에 관해 한 번 관심을 보인 그는 이윽고 다시 주변과 어우러져, 바람이 되기도 하였고, 손가락 위에 올라온 나비와 함께 손장난을 치기도 하였다. 그 광경을 가만히 바라보던 아델이 말했다.


“저는 왜 부르신 겁니까?”

아델의 질문에 포말하우트가 아델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아델이 한 걸음 물러섰지만, 그는 두 걸음 앞으로 다가와 아델에게 몸을 바짝 붙였다. 그리고 한쪽 팔로 그를 끌어안으머 말했다.

“네가 그 말을 해주기를 기다리고 있었어.”

순식간에 둘의 몸이 공중으로 뜨는가 싶더니 아까 새하얗게 빛나던 돔 입구에 와 있었다. 아델은 반 박자 늦게 찾아온 구역질에 입을 막고 고개를 숙였다. 그 모습을 본 포말하우트가 걱정하듯이 충고해 주었다.

“미안, 예민한 애들이 이런다는 걸 까먹었네. 토해도 괜찮아. 내가 치울게.”

그렇다고 해서 남이 보는 앞에서 추하게 구역질하는 모습을 보일 아델은 아니었다. 아델은 몇 번 구역질하는 소리를 내더니 이윽고 상태를 갈무리하며 허리를 세우고 섰다. 포말하우트는 그런 아델의 모습을 흥미롭게 쳐다보며 돔의 입구를 개방했다. 그의 손짓 한 번에 입구는 마치 존재하지 않았던 것 처럼 사라져 있었다.


돔 내부에 발광원이 하나도 없는데도 밝았다. 그리고 끝없이 지하로 이어지는 계단이 있었다. 포말하우트가 먼저 계단을 따라 내려가기 시작했고, 그 모습을 의심스럽게 바라보던 아델도 뒤이어 그의 뒤를 쫓아 계단을 내려갔다. 조용한 공간에 두 사람, 아니 한 사람과 별 하나의 발걸음 소리만이 타박타박 울렸다. 한참이나 이어지던 침묵은 아델에 의해 깨어졌다.

“이게 저랑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포말하우트가 발걸음을 뚝 멈췄다. 그리고는 아델을 돌아보며 환히 웃는다.

“지금부터 연구소를 만들 거거든. 축하해, 넌 창립 멤버 확정이야.”

아델이 그게 대체 왜 축하할 일인지를 물어볼 틈조차 없이 포말하우트는 자기가 하고 싶은 말들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물론 연구소엔 창의력이 필요해. 그쪽은 내가 전부 감당할 수 있어. 과학적 지식 또한 내가 감당할 수 있고 말이야. 그런데 나는 틀에 박힌 생각 쪽은 잘 못해서 말이지. 너도 나처럼 이쪽에 뛰어나지 않은 건 알고 있지만. 너는 그래도 훈련을 꽤 많이 받았잖아? 그래서 부른 거야. 자, 이 연구소의 구조를 만들어 줘, 규율을 만들어 줘.”


갑자기 프로젝트를 시키는 상사라니, 최악이다. 아델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속으로 프로젝트를 구상해 보았다. 구조라, 일단 팀부터 나눠야겠지. 인외 개체의 대부분이 소통이 불가능한 수준을 가지고 있으니까, 그 정보를 모으고 포획할 부서가 필요하다. 실험체로 인간을 쓸 거라면 그를 모집할 부서 또한 필요할 테고. 융합에 대해 연구하는 부서는 기본적으로 필요하겠지. 이쪽 인력을 어디서 어떻게 데려오느냐가 문제겠다만은.


“응, 좋아.”


현재까지 구조를 보아하니 이 건물은 지하로 무한히 확장되는 것 같다. 그러면 일단 최저층에 위험 물질을 때려놓고 한참 위에다가 시설을 세우는 게 낫겠지. 위험 물질이라 하면 역시 실험 중에 나온 폐기물일까. 인간과 인외 개체 사이에서 나온 폐기물이 어떤 특성을 가졌을지는 아직 아무도 모르니까. 또 표면적으론 평범한 연구소처럼 보여야겠지. 지상에 가까운 5층 정도는 일반 연구소 시설을 갖춰야 해. 그리고 실제 연구소는 조금 더 깊은 지하에 위치해야겠지. 무슨 일이 생겨도 증거 인멸까진 시간이 걸릴 테니까…….


“좋아!”


포말하우트가 아델 눈 앞에 대고 박수를 쳤다. 놀란 아델의 동공이 축소되었다가 다시 확장되었다. 포말하우트는 기분 좋은 듯 주위를 둘러보며 아델에게 연구소를 소개해 주었다.

“네가 구상한 대로 적당히 만들어 봤어. 어때? 맘에 들지?”

아델이 상상한 그대로의 연구소가 구현되어 있었다. 아델은 잠깐 놀라움에 말을 잃었다가 포말하우트를 신기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쳐다봤다. 그 시선을 마주친 포말하우트가 불만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있지, 너는 생각을 할 거면 하나에 좀 몰입해서 해 줘. 이상하게 네 생각은 흐릿해서 잘 안 읽힌단 말이야.”

아델은 그 말을 듣자마자 앞으로 모든 생각은 적당히 지나가듯이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상대가 생각을 읽을 수 있다면, 생각을 들켜서 좋을 일은 하나도 없었다. 그렇게 대충 생각한 아델이 연구소 전경을 둘러보다가 문득 이상한 점을 발견한 듯 포말하우트에게 질문했다.


“……직원은 어디서 구하죠?”

포말하우트는 세상에서 가장 쓸모없는 질문을 들었다는 듯이 대답했다.

“너 있잖아.”

이게 대체 무슨 소리란 말인가. 아까 생각한 역할을 혼자서 다 하라고? 절대로 불가능… 까지는 아니었다. 아델은 자신이 온갖 힘을 쥐어짜서 기예를 부리면 그 정도 역할을 전부 수행할 수 있다는 걸 알았다. 그리고 그 사실을 아는 건 눈앞의 상대도 마찬가지인 듯 했다. 하지만 눈앞의 상대는 알아채지 못한 게 하나 있었으니, 그런 무리를 여러 번 했다가는 정신이 산산히 갈린 아델이 무슨 짓을 저질러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아델은 잠시 연구소 폐기장에 몸을 던지는 자신에 대해 깊이 생각하다가 포말하우트에게 말했다.


“저 혼자서는 무리입니다.”

“그래? 그러면 다른 차원에서 좀 데려오지 뭐. 나머지는 여기서도 벌충할 수 있을 테니까.”

‘다른 차원’ 그 단어를 들은 아델의 인상이 찌푸려졌다. 아델은 슬슬 끝났으니 나가볼까라며 발걸음을 옮기는 포말하우트를 보며 ‘다른 차원’에 대해 질문했다. 포말하우트는 입꼬리에 짓궂은 미소를 걸치고는 친절하게 대답해 주었다.

“말 그대로야. 평행세계에 존재하는 이들. 그런데 원본과 달리 어긋나서 전혀 다른 길을 걷게 된 아이들을 말하지. 그 중에서도 내가 아끼는 애들한테나 붙는 호칭이지만 말이야.”

“아델. 참고로 너도 그들 중 하나야.”

당신은 수많은 세계에 존재한다. 어쩌면 당신은 어떠한 원본의 불완전한 복제품일지도 모른다. 말 그대로 존재의 폭력. 그것이 무참히 아델에게로 쏟아진다. 그러나 아델을 쏟아지는 화살의 세례 속에서도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 볼 뿐이었다. 그의 정체성은 애초에 그에게 있지 않았다. 그가 추구하는 가치 그 너머에 있었다. 그랬기에 그는 홀린 듯이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그럼 ‘다른 차원’엔, ‘아름다움’을 찾은 제가 존재합니까?”

포말하우트는 잠시 고민하던 표정을 짓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글쎄, ‘너’는 아니지만 ‘네’가 ‘아름다움’을 찾은 세계는 꽤 많지.”

아, 내가 쫓는 것은 실존하는 가치였구나. 아델의 심장이 거세게 고동쳤다. 안광 없던 그의 눈이 순간 생기로 빛났다. 그 광경을 웃는 얼굴로 지켜보는 포말하우트를 아델이 똑바로 노려보며 말했다.

“그렇다면 저는 이 길을 걷겠습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