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찬가 · 미르1화 — 손끝이 맞닿은 순간 (1)

CHAPTER 1

손끝이 맞닿은 순간 (1)

인간찬가 · 약 13분 분량 · 2026.10.04

세계가 창조된 이래 가장 현명했던 자들이 연구하고 꿈꾸어 온 것이 이제 내 손안에 있었다.
『프랑켄슈타인』 메리 셸리 지음


아델은 답지않게 한숨을 쉬며 침상에서 몸을 일으켰다. 이유 모를 악몽, 아니 사실 악몽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어쨌거나 그는 사나운 꿈자리에 고통받고 있었다. 깨어난 순간 모든 기억이 날아가 버리는 꿈. 텅 빈 마음의 자리를 불편함으로 가득 채우는 그 꿈이 머릿속을 가득 메웠다. 그는 제 코 아래로 끈적하게 흘러내리는 붉은빛 뜨거운 액체를 손으로 받아내며 발걸음을 옮겼다. 협탁 위 탁상시계의 짧은 바늘은 3과 4 사이를 가리키고 있었다.


욕실에 들어선 아델은 물을 틀고 피를 씻어냈다. 붉은 생명의 색이 투명한 물과 섞이며 녹아내린다. 그리고, 푸르게 빛난다.

“……?”

푸른 피를 가진 생물은 이 세상에 많다. 아델이 과학쪽으로 식견이 깊은 건 아니었지만, 백신을 만들 때 쓰는 투구게의 피가 파란색이라는 것 정도는 알았다. 여기서 의문이 생긴다.


나는 투구게인가?


아니, 아마도 아닐 것이다. 투구게는 갑각류에 속하지만 아델은 갑각류가 아니다. 그는 분명히 포유류였다. 온몸에 털이 얇게라도 나 있고, 추위 속에서도 한동안 체온을 유지하며, 기억은 안 나지만 분명히 어미의 젖, 하다못해 비슷한 것이라도 먹고 살았을 것이다. 그럼 왜 피에서 푸른 빛이 나는 것일까. 아델은 제 손에 끈적히 묻은 붉은 피를, 어느새 막힌 세면대에 은은하게 내려앉은 푸른빛을 번갈아 보았다.


모르겠다. 아델은 손에 남은 피를 마저 씻어내고 방으로 돌아갔다. 그는 자신에게 병증이 있음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저 환각을 보았을 뿐이고, 그저 수면 장애로 꿈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한 것 뿐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모든 게 설명됐다. 아델은 다시 방으로 돌아가 침대에 몸을 눕혔다. 그러나 다시 잠들 수는 없었다. 이번에는 편두통이 밀려왔기 때문이다.


편두통 환자의 25%~30%는 전조가 있는 편두통을 앓는다. 아델도 그 중 하나였다. 그렇기에 아델은 아파오는 머리를 부여잡으며 생각했다. 종전의 이상 현상이 단지 편두통 전조의 시야 이상일 뿐인가. 글쎄, 온갖 전조란 전조는 다 겪어본 아델이었지만 양쪽 눈에서 동시에 나타나는 전조는 경우에서 벗어난 일이었다. 그러나 전조니 뭐니 하는 것들을 지금 생각할 여유는 없었다. 첫 통증이 이 정도면 이후에 이어질 것들은 더 하리라. 아델은 눕히려던 몸을 다시 일으켜 거실로 나갔다. 그곳에 약을 모아두는 상자가 있었다.


편두통 발병 시 트립탄 복약은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 제 집에 놓인 물건의 위치라면 전부 강박적으로 기억하는 아델에게는 간단한 일이었다. 거실에 들어서자마자 상자에 손을 넣어 약병을 찾아낸 후 내용물을 털어내 물 없이 삼켰다. 곧이어 트립탄의 부작용이 몰려온다. 수도 없이 먹어온 만큼 내성은 생겼지만, 여전히 적응하기 힘든 그 부작용이. 


몸은 천천히 내려앉고, 근육에 위화감이 느껴지며, 심장 부근이 조여온다. 머리의 통증이 말끔하게 사라짐과 동시에 정신이 나른해지는 것이 느껴진다. 아, 이대로 다시 잠들고 싶다. 아델은 거실 소파에 등을 대고 누운 채 눈을 느릿하게 깜빡였다. 그 속도는 점차 느려졌고, 이윽고 아델의 눈꺼풀이 완전히 감기었다.



꿈 속은 푸르렀다. 거대한 푸름이 아델을 덮쳐온다. 눈앞에 거대한 빛이 아른거리며 시야를 뒤흔들고, 얇디얇은 실타래가 세상을 엮어낸다. 부드럽게 머리카락을 스치고 지나가며 시선을 빼앗은 푸른 빛무리가 한데 모여 무언가를 빚어낸다. 무심코 그것을 자세히 들여다 본 아델이 숨을 들이킨다. 아, 이 얼마나 불행한 운명인지.


눈을 마주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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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델이 거친 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 안이 시퍼렇게 밝았다. 꿈? 아직 꿈에서 벗어나지 못한 건가? 아델은 반쯤 뜬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려 했으나 그 시도는 곧 막히고 말았다. 뒤에서 누군가가 아델의 머리와 목을 양팔로 끌어안고 있었다. 심장이 미친듯이 뛰었다. 한동안 쓴 적 없는 생존본능이 깨어나 적색 경보를 울려왔다. 그러나 움직일 수 없었다. 마치 맹수를 앞에 둔 소동물처럼. 거대한 무언가에게 위압당해 손가락 끝도 움직일 수 없었다.


“아델.”

아델의 귓가에 목소리가 들려왔다. 노이즈 섞인 성인 남성의 부드러운 음색이다. 인정하긴 싫었지만, 꽤 듣기 좋은 목소리다. 아델은 대답하기 위해 입을 천천히 열었다. 그러자 목을 끌어안고 있던 팔을 움직여 아델의 입을 막았다.


“대답할 필요 없어, 아델. 난 네 모든 걸 이해해.”

그것은 퍽이나 친절한 말투로 아델에게 말을 걸어왔다.

“넌 내 기대를 뛰어넘었어. 한 번만에 알아차릴 줄 몰랐거든. 단지 우연일지라도, 이건 네 운명이야. 우린 언젠가 얽히고 말 거야, 그 때가 지금일 뿐이지. 자랑스러워해도 좋아, 아델.”

대체 뭘 자랑스러워 하라는 건지. 아델은 표정을 굳혔다. 그러나 알 수 없는 힘에 의해 그는 자신이 어색한 미소를 짓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힘이 들어간 입꼬리가 부들부들 떨렸다.


“응, 내가 누구냐고? 그건 중요하지 않아. 자, 안으로 들어가자. 네게 할 말이 있어.”

그것이 말하고는 아델을 일으켰다. 아델의 몸이 여전히 굳어 있었기에, 그것은 아델의 옆구리에 붙어 부드럽게 부축하듯이 몸을 잡아주었다. 그때 아델은 처음으로 그것이 어떻게 생겼는지 자세히 볼 수 있었는데, 기억에 남는 것이라곤 금방이라도 녹아내릴 듯 일렁이는 백색과 청색의 이미지가 전부였다.



어느새 둘은 티테이블에 마주보고 앉아 있었다. 테이블에는 막 끓여 김이 올라오는 루이보스 차 두 잔이 있었다. 그것이 아델 쪽으로 찻잔을 밀어 주었다. 아델은 잠시 의심 섞인 눈빛으로 찻잔을 바라보다가 떨리는 손으로 그것을 집어들었다. 향은 좋은데 매물이 적어 두고두고 마시던 차였다. 향은 여전히 좋았는데 대체 누가 이 찻잎에 무슨 짓을 한 건지 차가 더럽게 맛이 없었다. 아델의 표정이 미묘하게 굳어지는 걸 본 그것이 킥킥 웃었다.


“자기소개부터 할게. 난 포말하우트야. 너희들이 말하는 ‘신’이지.”

아델이 크게 기침했다. 기도로 넘어간 차가 잘못된 길에서 나오겠다며 몸부림을 쳤다. 갑자기 누군가 침입해서 자신을 신이라고 선언하다니. 약 2000년 전이었으면 이 일을 계기로 종교가 탄생했을 것이다. 종교 이름은 뭐, 포말하우트교 정도가 되겠지. 아델은 거의 눈가에 눈물이 고일 때가 되어서야 기침을 마쳤다. 그동안 차분히 기다리고 있던 포말하우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아델, 나는 너를 내 연구소의 직원으로 고용하고 싶어.”

아델의 오른쪽 눈썹이 휘어졌다. 이쪽 분야의 사람들 중에서 아델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아쉬워하며 명함을 건네주는 게 전부였다. 아델은 그 명함을 전부 모아서 휴지통에 집어넣고 제 갈 길을 갔고 말이다. 물론 그 길 끝에 낭떠러지가 있어 지금은 끝도 없이 떨어지고 있는 중이었지만.


그 와중에 들어온 취업 제안이다. 대체 누가 보낸 것일까. 이런 짓을 할 만한 사람을 떠올려 보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없다. 주변 사람들 중 아델을 구렁텅이에서 끌어올릴 만큼의 의욕을 가진 사람이라곤 단 한 명도 존재하지 않았다. 구경이라도 하러 오면 다행이지. 그가 그렇게 생각하자 포말하우트가 답답하다는 듯이 말했다.


“나는 누가 시킨 대로 움직이지 않아. 내가 원하는 거야.”

아델이 눈을 가늘게 떴다. 그의 두 입술이 떨어졌다. 그는 드디어 말을 할 수 있게 되었음에 내심 감탄하면서도 차분한 말투로 대꾸했다.

“연구소라뇨, 전 과학 쪽과 전혀 인연 없이 살아왔습니다만.”

“과학 따위가 왜 중요해? 우리는 진리를 쫓을 거야, 상식 같은 건 필요 없어.”

맞는 말이다. 진리를 쫓는 데는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으며, 모든 것이 필요하다. 상식도 그 중 하나일 뿐이다. 하지만 연구소라고 했지 않은가. 과학이 아니면 대체 무슨 수단으로 진리를 쫓겠다는 거지? 아델의 머릿속 질문에 대한 대답이 곧이어 포말하우트의 입에서 나왔다.


“인외 개체라고 알아?”

“예.”

이 정도는 시사 상식이었다. 지나가는 7살짜리 꼬마애한테 물어봐도 일단은 ‘네’라고 답할 것이다. 꽤 오래된 일이다. 웨스트우드로 인류가 거주해온 이후, 지구와는 다른 환경 탓에 종종 외계 생명체들이 흘러 들어오긴 했다. 그 자체로 외계인인 인류는 자신들의 영역을 넘어선 외계인을 ‘인외 개체’라 부르며 제거한다. 지금도 세계 어딘가에서 현재 진행중에 있는 일이다.

“나는 그 ‘인외 개체’들을 ‘인간’과 융합해 ‘신인류’를 만들고 싶어.”

위험한 말이 나왔다. 아델은 진지하게 고민하는 척 생각을 멈췄다. 그리고 마음 속으로 고민하기 시작했다. 스스로를 ‘신’이라고 칭하는 존재가, 인간과 인간 아닌 것을 융합하여 ‘신인류’를 만든다는데. 이 제안을 거절한다면 과연 자신의 신변이 보장될 수 있을까. 죽어도 상관없다는 말을 항상 입에 달고 다녔지만 막상 위기가 눈앞에 닥치니 생존 본능이 살아났다. 이딴 이유로 죽고 싶진 않았다. 바로 그때, 아델의 동요를 눈치챈 듯한 포말하우트가 그의 고민에 커다란 마침표를 찍었다.


“왜, 진정한 아름다움이라는 거. 여기서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

살아갈 이유를 잃은 예술가에게 이보다 더 달콤한 유혹이 있을까?


“약속할 수 있습니까?”

“모호한 질문은 안 돼. 구체적으로 물어봐.”

“진정한 아름다움이라는 거, 찾을 수 있습니까.”

“약속할게.”


포말하우트는 여전히 광휘에 휩싸인 채로 아델의 말에 대답하며 미소지었다. 아델은 순간 그에게서 아름다움의 편린을 보았으나 이어지는 말에 그 조각은 금방 흩어지고 말했다.

“그럼, 계약하자.”

포말하우트의 검지손가락 끝에서 흰 실이 뻗어나왔다. 그 실은 아델의 목을 한 번, 포말하우트의 목을 한 번 휘감아 세게 조였다. 아델이 ‘윽’ 소리를 냄과 동시에 실은 사라져 버렸다. 마치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아게 대체 뭐냐고 아델이 묻기도 전에 포말하우트는 제가 하고 싶은 말을 내뱉을 뿐이었다.


“이제 우리는 한 배를 탄 사이야. 잘 부탁해.”


잘 부탁해, 잘 부탁해, 잘 부탁해…

그 말이 머릿속에서 메아리침과 동시에 아델은 의식을 잃었다.



아델이 정신을 차린 곳은 침대 위였다. 그는 발작적으로 몸을 일으켰다. 호흡은 거칠었고, 온몸이 식은땀으로 축축했다. 꿈이었나, 그 모든 게? 머리가 어지러웠다. 고질병인 편두통이 아침부터 밀려와 머리가 지끈거렸다. 아델은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켜 거실로 걸어갔다. 거실에 있는 상자 안에서 편두통 약을 한 알 꺼내고 컵에 물을 따라 함께 마신 아델은 여전히 머리를 부여잡은 채로 소파에 쓰러지듯 앉으며 어젯밤의 기억을 떠올리려 애썼다.


요약하자면, 자신이 신이라는 작자가 찾아왔다. 그리고 인간과 인외 개체를 융합해서 신인류를 만들고 싶다고 했었지. 그 연구를 진행하는 데 자신을 연구원으로 삼고 싶다고도 말했고 말이다… 꿈자리 한 번 사납네.


익숙한 나른함과 불편감이 찾아오며 통증이 멈췄다. 아델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컵을 챙겨들고 싱크대를 향했다. 그러던 와중 눈에 무언가 거슬리는 게 있었다. 고개를 슬쩍 돌린 아델은 그만 컵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컵은 다행히도 싱크대 안으로 떨어져 깨지지 않았다.


베란다 티테이블에 찻잔 두 개가 사이좋게 놓여 있다.


기분전환삼아 차 두 잔을 끓여서 마시고 밖에다 그대로 놓아두고 왔을 확률은? 0에 수렴한다. 집에 도둑이 들어서 차 두 잔을 마시고 컵까지 안 치우고 갔다? 이 또한 가능성은 0에 수렴한다. 몽유병이 또 제발해 차를 끓이고 찻잔 두 개에 예쁘게 담아다가 차리고 다시 침대에 기어 들어가 잠들었을 확률은? 이건 뭐 따질 필요도 없었다. 그냥 0이다. 그렇다면 이제 가능성은 하나밖에 남지 않았다.


어제 꾼 꿈이 현실이었다면? 모든 게 말이 됐다. 자세한 과정은 모르지만 자신이 어느 순간 포말하우트와 함께 저 티테이블에 앉아 있었으니까. 그리고 그와 자신의 앞에 향은 좋지만 맛은 더럽게 없는 루이보스 티가 올라와 있었으니까. 아델은 비틀거리며 베란다로 걸어가 찻잔 두 개를 집어들었다. 두 잔 모두 맑은 붉은색의 차가 반쯤 차올라서 찰랑거리고 있었다. 꿈이랑 다른 점이라면, 이젠 둘 다 식어빠져 김따위 올라오지 않는다는 것 뿐일까.


아델은 찻잔 두 개를 싱크대에 조심히 내려놓고 방을 향해 빠르게 걸었다. 분명히 놓친 게 있을 것이다. 방문을 열자마자 아델은 자신의 판단이 옳았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침구 위에 눈에 띄는 흰색 명함이 올라와 있었다. 이 집에서 쓰레기통에 들어가지 않은 명함은 없다. 어제 낮 이후로 준 명함이라면 말이다.


<레전드 연구소> 연구소장 | 포말하우트

……꿈이 아니었다. 현실이었다. 아델은 표정을 찡그리며 손에 들린 명함을 내려다 보았다. 눈이 아플 정도로 새하얀 명함이 아델의 기억을 자극했다. 어젯밤에 만난 포말하우트, 그리고 그가 한 약속.


‘진정한 아룸다움.’

아델은 길게 숨을 내쉬며 명함을 손에 꽉 쥐었다. 그의 얼굴에 비틀린 미소가 떠올랐다. 그래, 어차피 실패한 몸. 이름 하나 제대로 촌스러운 연구소에서 제대로 버려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