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라니 · 호이8화 — 에필로그: 변태

CHAPTER 8

에필로그: 변태

고라니 · 약 6분 분량 · 2026.09.30

눈을 떴을 때, 머리맡에서 익숙한 기계음이 울리고 있었다.

[긴급] ㅇㅇ산 일대 멧돼지 출몰 주의…….

지자체에서 보낸 긴급 재난 문자였다. 날짜를 확인하니 아버지를 따라 산으로 들어갔던 바로 그날 아침이었다. 온몸이 땀으로 흥건히 젖어 있었다. 나는 거실로 뛰어나가 장비를 챙기던 아버지의 소매를 붙잡았다. 오늘만큼은 절대 산에 가선 안 된다고, 제발 집을 나서지 말라고 울부짖으며 당부했다. 내 지독한 만류 끝에 아버지는 결국 걸음을 돌렸고, 우리는 산으로 가지 않았다.

사고는 일어나지 않았다.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온 평화로운 일상이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인간의 마음이란 가장 안전한 곳에서 가장 치명적인 균열을 일으키는 법이다. 그 비닐하우스 안에서 내 살결을 파고들던 남자의 서늘한 체온, 나를 비웃던 그 건조한 목소리, 살결이 미친듯이 생각났다. 머리가 깨질 것처럼 그 동물적인 감각들이 나를 괴롭혔다. 그것이 내 삶을 통째로 집어삼키려는 저주였음을 알면서도, 놈이 남긴 손길은 지독한 중독이 되어 내 온몸의 세포를 지배하고 있었다. 삶의 모순이란 언제나 이렇듯 거역할 수 없는 파멸의 얼굴을 하고 찾아온다.

참을 수 없었다. 나는 혼자 오밤중에 집을 나서, 남자를 들처매고 넘었던 그 터널 위 산길을 따라 걸었다. 가파른 능선을 지나 안개 낀 바위 아래 누워 잠을 청했다. 남자는 없었다.

새벽이 되자 눈을 떴다. 안개를 헤치며 내려가 보니, 놀랍게도 내가 남자를 앉혀두고 히치하이킹을 했던 가드레일과 국도가 고스란히 존재하고 있었다. 환각이라기엔 장소들이 너무나 생생한 현실이었다.

집으로 돌아온 나는 미칠 것 같은 갈증에 시달렸다. 남자의 비닐하우스를 어떻게 찾아갔는지, 그 경로를 떠올리려 애썼지만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망각이라는 잔인한 벽 앞에서 머리를 쥐어짜며 방 안을 맴덤던 순간, 번뜩 머릿속을 스치는 잔상이 있었다. 바위 동굴 속에서 놈의 주머니를 뒤적였을 때, 만져졌던 신분증의 주소지였다.

나는 홀린 듯 그 주소를 찾아 나섰다. 삶의 궤도를 이탈하는 서막이었다.



지독한 욕정


네비게이션도 제대로 잡히지 않는 외딴 야산 한복판이었다. 눅눅한 흙 냄새가 코를 찌르는 숲길을 헤치고 들어갔을 때, 수풀 너머로 낡은 비닐하우스 한 동이 보였다. 그 앞, 썩은 이끼가 잔뜩 낀 흙바닥 위에 무언가 덩그러니 서 있었다.

인간이 아니었다. 한 마리의 야생 고라니였다.

고라니는 허벅지 부근에 검붉은 피가 눌어붙은 채, 다리를 미세하게 절뚝거리고 있었다. 놈은 도망치지 않았다. 오히려 고개를 돌려 나를 빤히 응시했다. 푸르스름한 안개 속에서 마주한 짐승의 짙은 눈동자. 그것은 비닐하우스 안에서 턱을 괸 채 나를 비웃던 그 남자의 서늘한 눈빛과 소름 끼치도록 닮아 있었다.

놈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짐승 특유의 침묵으로 나를 응시할 뿐이었다. 인간의 언어로는 차마 설명할 수 없는, 쓸쓸하고도 서늘한 침묵. 나를 비웃듯 주둥이를 뒤틀며 깊은 산속 너머로 사라지려 할 때, 내 안에서 무언가 툭 끊어지며 걷잡을 수 없는 폭주가 시작되었다.

"거기 서."

짐승이라는 것을 뼈저리게 알면서도, 그 눈빛을 마주한 순간 내 안의 욕망이 거칠게 폭발했다. 그가 사라진 안개 속으로 몸을 던졌다. 그것은 이성도 도덕도 완벽히 휘발되어 버린, 지독하게 동물적인 갈증이었다. 비닐하우스 안에서 나를 지배하던 그 서늘한 온기를, 이 짐승의 육체를 통해서라도 다시 탐닉하고 싶었다. 인간으로서의 삶을 포기하더라도, 그 지독한 속박 속으로 다시 걸어 들어가고 싶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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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수풀을 헤치고 들어가 다리를 절뚝이는 고라니를 거칠게 낚아채 품에 안았다.



두 마리의 짐승


품에 안긴 고라니는 인간의 가죽을 쓴 나를 거부하며 미친 듯이 발버둥을 쳤다. 얇고 단단한 발굽이 내 정강이를 거칠게 걷어찼고, 뻣뻣한 털 가죽이 내 살결을 사정없이 긁어내렸다. 짐승은 울음소리조차 내지 못한 채, 오직 헐떡이는 가쁜 숨을 내쉬며 내 품에서 벗어나려 몸부림쳤다.

그러나 나는 놈을 놓아주지 않았다. 터져 나오려는 악에 받친 숨을 몰아쉬며, 발버둥 치는 고라니를 더 억세고 단단하게 내 품에 가두었다. 놈의 허벅지에서 묻어난 검붉은 핏자국이 내 옷과 뺨에 끈적하게 묻어났지만 그것은 더 이상 아무런 방해물도 되지 못했다.

"가지 마. 내 곁에 있어."

내 목소리는 이미 본능만 남은 날것의 비명으로 변해 있었다. 고라니의 단단한 가슴이 내 심장 위를 압박해왔고, 서로의 거친 호흡이 안개 속에서 한데 엉겼다. 이 짐승을 놓치는 순간 내 존재의 의미마저 완벽하게 지워질 것이라는 맹목적인 집착이 손가락 끝에 악력으로 쥐어졌다. 발버둥 치는 짐승의 무게감을 온몸으로 받아내며, 나는 흙바닥 위로 놈과 함께 굴렀다.

그 지독한 마찰과 격통 속에서, 마침내 내 몸에 기이한 변화가 일어났다.

척추를 찌르는 듯한 극심한 오한과 함께, 손가락 끝의 감각이 마비되며 딱딱하게 굳어갔다. 손톱이 빠져나간 자리에 검은 발굽이 돋아났고, 매끄럽던 내 살결 위로 거칠고 뻣뻣한 이끼색 털이 무서운 속도로 자라나기 시작했다. 인간의 언어를 뱉던 목구멍이 좁혀지며 오직 가쁜 숨소리만이 새어 나왔다. 인간이라는 껍데기가 찢겨 나가는 고통은 역설적이게도 무서우리만치 황홀한 쾌락이었다.

마침내 격렬했던 발버둥이 멈추었다. 정신을 차렸을 때, 내 시야는 인간의 그것보다 훨씬 낮고 넓어져 있었다. 두 다리 대신 얇고 단단한 네 발로 흙을 딛고 있었다.

내 앞에는 나를 가만히 내려다보는 고라니가 서 있었다. 놈은 더 이상 도망치지 않았다. 우리 사이에 언어는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놈의 짙은 눈동자가 내 전신을 핥듯 내려다볼 때, 나는 비로소 완전한 안도감을 느꼈다. 이것이야말로 산이 내린 완전한 축복. 사냥꾼이던 내가 도리어 사냥감이 되었다.

인간의 세상에서 완벽하게 추방된 두 마리의 짐승. 우리는 눅눅한 안개 속에서 서로의 몸을 부비며 체온을 섞기 시작했다. 영원히 끝나지 않을 수렵도 속에서, 나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는 고라니가 되어 오직 서로만을 소유한 채 밤의 안개 속으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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