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
커튼 그림자가 일렁이더니 천천히 사람 형체를 띄었다. 목소리는 그 형체에서 나오고 있었다.
“자기소개는 넘어가지, 지금은 우리의 정체를 알릴 수 없으니.”
그림자가 천천히 기울어졌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우릴 위해 일해줬으면 한다.”
크리스와 세라가 서로 눈을 맞췄다. 그림자가 이어 말했다.
“진실이 궁금하지 않나? 아니면 더 나은 미래라던가.”
크리스가 이게 무슨 소리냐며 리에를 바라봤지만 리에는 싱긋 웃으며 출입문을 닫았다. 세라가 얼굴을 찡그리며 말했다.
“지금 협박하는 거야?”
“똑똑한 아가씨인 줄 알았더니 그것도 아닌가 보군.”
“그 이야기는 완전히 관련 없는 얘기 아닌가?”
그림자가 한 발자국 세라 앞으로 다가왔다.
“그렇다면 먼저 우리의 성의를 보이지. 그 사이에 너흰 선택해라.”
그 말을 마지막으로 그림자는 다시 커튼의 형상을 띄었다. 리에가 다가왔다.
“여기서 살아도 좋아. 대신 너희는 우리의 부탁을 들어줄지 계속 고민해줘. 선택할 때까지 의식주를 제공해줄게.”
그러나 세라는 자리에서 일어나 방문 앞으로 갔다.
“여기서 나갈래.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니야.”
그러나 문은 열리지 않았다. 대신 그날 저녁은 레베카의 수프랑 똑같은 맛의 음식이 나왔다.
“엄마가 해준 거랑 맛이 똑같잖아⋯⋯.”
세라는 한숨을 푹 내쉬며 손등으로 눈가를 닦았다.
다음 날, 세라는 크리스를 데리고 또다시 탈출을 시도했다.
나무 사이를 거닐던 두 사람의 눈에 보인 건 아까까지 있던 저택이었다.
세라가 주먹을 꽉 쥐었다.
3/3 세라가 먹고 싶다고 중얼거렸던 음식이 테이블에 올라오고 크리스가 필요하다고 얘기했던 책이 침대 위에 나타났다.
따뜻한 옷과 음식, 이부자리, 필요한 물건들이 계속 제공됐으며 하인들이 다가와 계속 필요한 것을 물었다.
어린 아이의 모습을 한 하인에게 크리스가 물었다.
결국 참지 못한 세라가 벽을 주먹으로 때렸다.
“갈 곳이 없는 건 매한가지야. 일단 주어진 걸 받아들이자.”
“엄마가 죽인지 며칠이나 됐다고 이 사람들을 믿자는 거야?”
“그러니까 더 알아야 해. 이상하잖아. 왜 엄마가 군인한테 죽어야 해?”
“세라, 우리는 계속 나아가야 해. 엄마를 위해서라도.”
결국 그들이 마음을 정해 그림자 앞으로 다시 갔을 때, 그림자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순간 바람이 휙 불어왔다. 방 이곳저곳에 놓여있던 책들이 펼쳐졌다.
“본론부터 말하자면 너희는 황궁에 들어간다. 가서 우리에게 이로운 정보를 주면 된다.”
“그래, 너희는 시골에서 살았으니 모르겠지만 지금 황궁은 혼란 상태다. 지금 들어가는 게 섞이기 좋아.”
“그래. 너희한테도 이로운 정보일 테지. 키리오라는 사람을 찾고 조사해라. 그리고 빠짐없이 보고해라.”
휜 종이 위에 점이었던 두 사람은 그 점이 점점 이어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무언가 시작되고 있다는 것도.
크리스와 세라의 반복되는 물음에도 리에와 그림자는 답해주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알게 될 거라며 대답을 회피하는게 아닌가.
“우리가 조사해야 한다며. 이 사람이 누군지도 안 알려주는 거야?”
결국 아무런 정보를 얻지 못한 두 사람은 멍하게 수도로 가는 날만 기다려야 했다.
“황궁에 들어가려면 궁인으로 들어가는 게 나을 것이다. 궁인 지원 접수처에 갔다 와라.”
이곳저곳에 처형장이 세워져 있어 사람들이 죽었고, 지나가는 사람들의 낯빛은 새파랬다.
크리스는 비스듬히 열린 창문 너머로 그 광경을 바라보다 조용히 로브를 뒤집어 썼다.
“수도에선 눈을 보이지 않는 게 중요하다고 그랬지.”
세라의 말에 의하면 이름을 말하는 것보다 상대의 눈동자를 보는 게 더 중요한 행위라고 그랬다.
인간은 하나의 세계이며 그 세계를 유일하게 들여다볼 수 있는 게 눈동자기 때문에.
“눈동자를 함부로 보여주는 것도 안 돼. 눈동자로 많은 걸 알 수 있거든.”
눈 색이나 동공의 모양 등에 따라 신분이나 신상이 갈린다고 했던가.
크리스와 세라는 굉장히 평범한 터라 위험하진 않을 거라 했지만 그래도 조심하는 게 좋을 거라고 했던 그림자의 말이 떠올랐다.
접수처는 수도에 위치한 관리 본부라는 큰 건물에 있었다.
하얀 로브를 쓴 책사들이 사람들의 지원을 받고 있었다.
책사가 크리스를 바라보며 낮은 어조로 말했다.
그림자는 이름을 물었을 때 솔직하게 답하는 게 좋다고 말했다.
“크리스라고 합니다. 그, 그냥 시민? 어, 학생이에요.”
크리스가 천천히 로브를 걷어 눈동자를 보였다.
크리스는 그런 책사를 가만히 바라보다 작게 물었다.
“혹시 키리오라는 사람에 대해 알고 계십니까?”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던 책사의 움직임이 멈췄다. 깃펜에서 잉크가 한 방울 떨어져 종이를 적셨다.
“궁인 시험은 일주일 후 있을 예정이니 이 브로치를 달고 황궁으로 오시면 됩니다.”
크리스는 인파를 해치고 나왔다. 마침 세라도 브로치를 들고 나오고 있었다. 세라가 한숨을 내쉬었다.
마차에 오른 두 사람은 멍하게 서로의 얼굴만 쳐다봤다.
게다가 키리오란 사람은 죄인인 것인지, 아무도 그에 대해 얘기해주지 않았다.
이상하다고 든 의문마저도 순식간에 몰려온 피로 앞에서 부서졌다.
그림자는 생각에 잠긴 듯 고개를 기울였다. 세라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나저나 이건 너무한 거 아냐? 정보의 불균형이라 하지. 너희만 알고 우리는 모르는 게 어디 있어. 너흰 정체가 뭐야?”
“불균형이라. 아니, 정보는 평등하게 분배되어 있다.”
그림자는 이번에도 대답을 회피하는 듯 다시 커튼의 형상으로 변했다. 세라가 혀를 쯧, 찼다. 세라의 뒤에선 크리스가 책장 앞에 서 있었다. 책을 살펴보던 크리스가 읽던 책을 꽂으며 말했다.
“진짜, 뭐가 뭔지 모르겠어. 대체 우리 주위에서 뭐가 돌아가고 있냐고.”
뒤에서 그림자가 졌다. 리에가 웃으며 모자를 벗고 인사했다. 세라는 퉁명스런 얼굴로 고개를 획 돌렸다.
“정보가 필요한 너희들을 위해 와준거지. 감사해.”
리에의 손에는 책 두 권이 들려 있었다. 리에가 책을 크리스에게 건네며 덧붙였다.
크리스가 책을 무작위로 펼쳤다. 생명학과 귀족의 관련, 생명마법의 기원, 인체 해부도와 생명학……. 크리스가 리에를 올려다봤다.
“아까 읽었던 것과 다름없는 의학 서적이네. 다른 게 있다면 귀족학이 들어가 있다는 거?”
“정답이야. 지하의 도서관에서 가져온 거야. 이제 내 뜻을 좀 알겠어?”
크리스는 천천히 리에를 올려다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세라가 일그러진 얼굴로 크리스를 쳐다봤다. 크리스는 지하로 가는 계단 앞에서 세라에게 손짓했다.
“뭔가를 숨기고 있어. 그렇다는 건 찾아줘야지. 저택에 분명 단서가 있을 거야.”
세라가 리에를 곁눈질로 쳐다봤다. 리에가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이건 뭐, 협박하는 것도 아니고……. 그래, 좋아. 지하부터 살펴보자.”
두 사람이 티격태격하며 지하로 내려가는 걸 보던 리에는 천천히 모자를 썼다. 저택 안으로 바람이 불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