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는 작위적인 인물이었다. 그의 거처가 된 이름 없는 마을에서도 그의 존재는 마치 흰 종이 위에 찍은 검은 점처럼 돋보였다. 그의 존재는 흑발에 앳된 외모와는 달리 뛰어난 재주와 재능으로 마을을 바꿔놓았다. 글을 모르던 마을 사람들은 그로 인해 글을 읽게 되었고, 마을에 이름까지 붙이게 되었다. 언젠가 마을의 촌장이 그에게 정체를 물었을 때, 크리스는 이렇게 말했다.
“제가 누구인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기억나는 건 이름밖에 없어요.”
보기엔 그냥 눈매가 날카로운 검은 새끼 고양이처럼 생긴 그는 덕분에 마을 안에선 최대의 의문이였다. 그냥 수도권에 살다 사고가 나 마을로 들어오게 된 나그네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고 새로 바뀐 정부에서 보낸 자객이라는 말도 있었다. 아니면 고양이가 사람으로 변해 나타났다는 이야기도······. 하여튼 크리스가 지나가면 사람들은 서로 모여 수군거리곤 했다.
“누구인지 뭐가 중요해. 나는 좋은데? 행복해졌다면 뭐든 괜찮은 거 아니겠어?”
레베카가 크리스의 어깨를 세게 때렸다. 그녀는 갈 곳이 없던 크리스를 기꺼이 거둔 사람이었다. 그녀는 고아원 선생님 출신으로, 갈 곳 잃은 아이들을 거두어 기르곤 했다. 크리스 역시 그런 아이 중 하나였고, 그녀의 양아들이 되었다. 레베카에겐 양딸이 한 명 더 있었는데, 이름은 세라로 길고 찰랑이는 검은 머리가 특징인 아이였다. 크리스와 세라는 어색한 남매 같았다. 두 사람이 식탁에서 밥을 먹을 때면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을 정도였다. 그러나 레베카는 두 사람을 자랑스러워하며 길렀다.
나뭇잎의 색이 바뀌길 두 번, 가지 위로 꽃들이 봉우리를 터트렸다. 둥근 언덕 위에서 크리스는 떨어지는 꽃잎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 옆에선 세라가 뜨개질을 하고 있었다. 그녀의 손이 바늘 위에서 교차했다. 두 사람 사이엔 아무런 말이 없었다. 어색하다기엔 애매한 침묵이 익숙하게 두 사람 위로 내려앉았다.
“······또 그런 행동을 하는구나.”
의외로 침묵을 깬 건 세라였다. 세라는 가늘게 눈을 뜬 채로 크리스를 바라봤다. 크리스는 멍한 얼굴로 세라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의외네. 네가 먼저 말을 걸 줄은 몰랐어.”
“먼저 날 따라온 건 너잖아. 말이라도 걸어야 내 속이 시원하겠어. 그래서, 뭐하는 거야?”
“꽃비를 맞으면 항상 봄이 왔다는 실감이 나서. 그 느낌이 좋아.”
“기억도 없다면서 항상?”
세라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하얀 손끝에 꼬인 실들이 점차 무언가의 형상을 띄었다. 크리스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엉킨 살타래를 바라봤다.
“그건 무슨 문양이야? 처음 뜨는 거 아냐?”
세라가 곁눈질로 그를 바라보다 대답했다.
“맞아. 그냥 머릿속에 떠오르길래. 그나저나 넌 시인을 해도 되겠어.”
“아직 네 세상이 좁아서 그래. 나보다 더 잘하는 사람들은 더 할걸? 너도 잘하잖아. 특히 열불 내는 거.”
“그래그래, 말 한마디도 안 지시겠다."
세라는 뜨개실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 멀리 레베카가 손을 흔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