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위적 캐릭터 · 제이여라1화 — 01, 운명이란 시간 속에서

CHAPTER 1

01, 운명이란 시간 속에서

작위적 캐릭터 · 약 11분 분량 · 2026.09.30

크리스는 작위적인 인물이었다. 그의 거처가 된 이름 없는 마을에서도 그의 존재는 마치 흰 종이 위에 찍은 검은 점처럼 돋보였다. 그의 존재는 흑발에 앳된 외모와는 달리 뛰어난 재주와 재능으로 마을을 바꿔놓았다. 글을 모르던 마을 사람들은 그로 인해 글을 읽게 되었고, 마을에 이름까지 붙이게 되었다. 언젠가 마을의 촌장이 그에게 정체를 물었을 때, 크리스는 이렇게 말했다.


“제가 누구인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기억나는 건 이름밖에 없어요.”


보기엔 그냥 눈매가 날카로운 검은 새끼 고양이처럼 생긴 그는 덕분에 마을 안에선 최대의 의문이였다. 그냥 수도권에 살다 사고가 나 마을로 들어오게 된 나그네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고 새로 바뀐 정부에서 보낸 자객이라는 말도 있었다. 아니면 고양이가 사람으로 변해 나타났다는 이야기도······. 하여튼 크리스가 지나가면 사람들은 서로 모여 수군거리곤 했다.


“누구인지 뭐가 중요해. 나는 좋은데? 행복해졌다면 뭐든 괜찮은 거 아니겠어?”


레베카가 크리스의 어깨를 세게 때렸다. 그녀는 갈 곳이 없던 크리스를 기꺼이 거둔 사람이었다. 그녀는 고아원 선생님 출신으로, 갈 곳 잃은 아이들을 거두어 기르곤 했다. 크리스 역시 그런 아이 중 하나였고, 그녀의 양아들이 되었다. 레베카에겐 양딸이 한 명 더 있었는데, 이름은 세라로 길고 찰랑이는 검은 머리가 특징인 아이였다. 크리스와 세라는 어색한 남매 같았다. 두 사람이 식탁에서 밥을 먹을 때면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을 정도였다. 그러나 레베카는 두 사람을 자랑스러워하며 길렀다.


나뭇잎의 색이 바뀌길 두 번, 가지 위로 꽃들이 봉우리를 터트렸다. 둥근 언덕 위에서 크리스는 떨어지는 꽃잎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 옆에선 세라가 뜨개질을 하고 있었다. 그녀의 손이 바늘 위에서 교차했다. 두 사람 사이엔 아무런 말이 없었다. 어색하다기엔 애매한 침묵이 익숙하게 두 사람 위로 내려앉았다.


“······또 그런 행동을 하는구나.”


의외로 침묵을 깬 건 세라였다. 세라는 가늘게 눈을 뜬 채로 크리스를 바라봤다. 크리스는 멍한 얼굴로 세라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의외네. 네가 먼저 말을 걸 줄은 몰랐어.”

“먼저 날 따라온 건 너잖아. 말이라도 걸어야 내 속이 시원하겠어. 그래서, 뭐하는 거야?”

“꽃비를 맞으면 항상 봄이 왔다는 실감이 나서. 그 느낌이 좋아.”

“기억도 없다면서 항상?”


세라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하얀 손끝에 꼬인 실들이 점차 무언가의 형상을 띄었다. 크리스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엉킨 살타래를 바라봤다.


“그건 무슨 문양이야? 처음 뜨는 거 아냐?”


세라가 곁눈질로 그를 바라보다 대답했다.


“맞아. 그냥 머릿속에 떠오르길래. 그나저나 넌 시인을 해도 되겠어.”

“아직 네 세상이 좁아서 그래. 나보다 더 잘하는 사람들은 더 할걸? 너도 잘하잖아. 특히 열불 내는 거.”

“그래그래, 말 한마디도 안 지시겠다."


세라는 뜨개실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 멀리 레베카가 손을 흔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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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감자로 스프를 만들어 봤어. 내 손맛 알지? 엄청 기대해도 좋아!”


식탁에 나란히 앉은 두 사람은 차례로 스프를 받았다. 그릇 너머로 스프가 출렁였다. 숟가락을 들고 천천히 떠먹던 크리스는 자신도 모르게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무언가 가슴 속에서 울렁거렸다.


“크리스, 왜 그러니? 맛없어?”


레베카가 크리스에게 다가가 이마에 손을 올렸다.


“열은 없는데, 식욕이 없는 거니?”

“그냥.”

“그냥?”

“그러니까⋯⋯.”


세라가 얼굴을 찡그리며 천천히 스프를 입에 넣었다.


"음.”


세라의 동공이 천천히 커졌다.


"맛없어. 어제랑 익숙한 맛이네."

"뭐?"


레베카가 천천히 그의 앞에 놓인 스프 그릇을 들어 올렸다. 크리스의 시선이 스프를 따라 갔다.


“괜찮아, 다시 만들면 되지.”


크리스는 아무런 대꾸 없이 방으로 들어갔다. 레베카는 크리스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천천히 세라의 그릇도 들어올렸다. 세라가 말했다.


“나도 방에 가볼게. 뜨개질 할 게 남아있어서.”

“좋아. 이번에는 엄마 목도리 끝까지 떠주는 거지?”

“당연하지, 내가 누군데.”


세라는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말을 덧붙였다.


"그러고 보니 그 꿈 말인데."


그 모습을 웃으며 바라보고 있던 레베카의 얼굴이 순간 싸해졌다. 세라가 말했다.

 

"어제도 꿨어. 크리스도 꿨대. 몽인이라도 불러야 하는 거 아니야?"


핏빛이 없는 낯으로 레베카는 그녀를 바라보다가 조용히 웃었다.


"걱정하지 말아. 엄마가 뭐든 다 할 수 있으니."


그렇게 세라를 보낸 레베카는 천천히 부엌에 붙어있는 창고에 들어갔다. 창고 구석에 놓인 거울 하나를 들어 올린 레베카는 거울을 툭툭 쳤다. 거울 표면이 일렁였다. 레베카가 아주 작은 소리로 거울을 작게 기울였다.


“변화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아주 작은 속삭임이 바닥을 타고 굴렀다.



 *



침대에 누우니 천장이 밤하늘처럼 높았다. 크리스는 가슴을 툭툭 치며 울렁거리는 속을 달려려고 애를 썼다. 무언가 걸린 듯 넘어가지 않았고, 그와 동시에 배는 계속 꾸르륵 소리를 냈다.


“오늘 하루 종일 누워있기만 했는데.”


꽃가루라도 맞은 걸까. 아니면 속에 문제가 생긴 걸까. 아니면 그와는 계열이 다른 문제가 생긴 건가. 그는 천천히 그 형상을 느껴보기 위해 눈을 감았다. 무언가 뱃속에서 넘어오려고 하는 것 같았다. 화장실로 가 구토를 해봤지만 빈 속에선 넘어올 것도 없었다.


다시 침대에 누웠다. 고요한 적막이 크리스 곁을 맴돌았다. 졸린 것 같기도 했다. 크리스는 이불을 끌어당겨 덮고 천천히 눈을 감았다. 무언가 천천히 빨려 들어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잠들기 전, 항상 느껴지는 묘한 느낌이었다. 그 사이로 무언가 천천히 들어왔다. 무언가 훌쩍훌쩍 우는 소리가 들렸다.


누군가가 계속 울고 있다. 모습도 보이지 않지만 뭔가 익숙하다. 그는 웅크린 채 어깨를 들썩였다. 크리스는 항상 그 모습을 내려다보고 있다.


“귀신인가. 세라도 최근에 꾼다고 했었지.”


이유라도 들어볼까. 그런 이유로 그의 앞에서 쭈그려 앉는 순간 다시 부드러운 감각이 느껴진다. 이불과 베개. 그리고 축축해진 눈가. 그리고 중얼거리는 말 한마디.


“잊어.”


그 스프처럼 뭔가 단단히 엉키고 씹지 못할 것들이 계속 굴러다니는 것 같았다. 공허한 방. 크리스는 천천히 머리카락을 꼬았다.


“잘 잤니? 두 사람 모두 좋은 꿈 꿨어?”


설거지를 하고 있던 레베카가 윙크를 날렸다. 세라와 크리스는 천천히 서로를 바라봤다. 두 사람 다 밤새 뒹굴었는지 머리카락이 엄청 헝크러져 있었다. 거울을 바라본 세라가 비명을 지르며 중얼거렸다.


“난 원인을 찾아야겠어.”

“원인?”


세라가 머리카락을 손가락에 감았다.

 

“꿈. 또 그 꿈이야. 속이 터져서 못 참겠네. 조사해야겠어. 아니면 너도 도와주던가.”


크리스가 고개를 들어올렸다.


“꿈에서 원인을 찾을 수 있을까? 그냥 꿈인데? 의미를 부여하면 다르게 보이겠지만.”

“이렇게 이상한 꿈만 꾸는 것도 한계야. 뭐라도 하는 게 낫지 않겠어? 몽인도 그것 때문에 존재하는 거 아닌가. 꿈속과 현실을 연결해주는 장치 같은 거잖아.”

“의외네. 몽인에 대해서 넌 안 믿는 눈치였잖아. 전에 한번 찾아갔다가 완전 망했다면서?”

“그 이야기는 그만둬라.”

“그래, 뭐. 할 것도 없으니 같이 조사해보자.”


그런 크리스의 앞으로 책 한 권이 던져졌다. 이것부터 읽어봐. 세라가 눈짓으로 신호했다. 크리스가 소리내어 책 제목을 읽었다.


“꿈과 이상현상⋯⋯.”

“우리 강아지들, 얼른 밥 먹어. 식겠어.”

“엄마의 맛없는 스프라면 사양이야. 소금을 너무 많이 넣는다니까. 그것보단 원인을 찾고 싶어. 근데 열심히 하려면 밥을 먹는 게 맞지.”


세라와 크리스가 다시 식탁에 앉았다. 그들의 앞으로 스프가 담긴 그릇이 놓였다. 익지 않은 감자. 과할 정도로 짠 스프. 레베카는 특히 이 스프를 끓이기 어려워했다. 크리스는 다시 숟가락을 잡았다.


“이번엔 처음으로 목소리가 들렸어.”

“뭐?”

“⋯⋯잊으라는 목소리.”


세라가 눈을 천천히 깜빡였다.


“너도?”

“뭐?”


그 순간, 레베카가 고개를 들어 크리스를 쳐다봤다. 세라가 외쳤다.


“엄마, 손!”

“손?”

“베었잖아.”

“아.”


세라가 급하게 붕대를 가져왔다. 크리스가 나지막하게 물었다.


“어디서?”

“어디긴 그냥 꿈속이지. 아주 깊고 어두운 곳⋯⋯.”

“나돈데.”


붕대를 감던 세라의 손이 멈췄다. 레베카의 흔들리는 눈동자 안으로 크리스가 담겼다.

 

“혹시 그 사람도 있어?”

“응. 울고 있어. 항상.”

“뭐라고 하면서 울어?”

“그냥 엄청 울어. 엄청⋯⋯.”

“꿈이 그렇게 신경 쓰이는 거니?”


세라의 손짓을 잠깐 거부하고, 레베카가 싱긋 웃었다. 크리스와 세라의 시선이 레베카에게 꽂혔다.


“엄마?”

“따라오렴.”

 

레베카는 천천히 서재로 들어가며 손짓했다. 뭔가 이끌리듯 크리스와 세라는 레베카의 그림자를 따라갔다.

 

“그러고 보니 서재를 보여주는 건 처음이구나.”


흐릿한 기억이 올라왔다. 레베카의 눈에 처음 들었을 때 크리스는 서재에 끌렸다. 왠지 모르게 저기 있으면 모두 편해질 것 같았다. 마치 어머니의 품에 들어간 것처럼. 모든 게 나아질 거라고 믿을 수 있었다. 그냥 그런 느낌이 들었다.


“안돼요.”


그때, 레베카는 그런 크리스를 저지했다.


“아주 나중에 보여줄게요.”


그런 말을 마지막으로 기억이⋯⋯.


“어?”


차가운 문고리에 손이 닿았다. 익숙한 무게감이 들었다. 세라가 크리스를 쳐다봤다.


“왜 그래?”


레베카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열고 들어가면 돼. 세라도 보렴. 둘이 다 같이 봐.”


레베카를 지나쳐서 서재에 들어가자 수많은 책들이 책장에 꽂혀 있었다. 마법과 관련된 이야기. 오래된 신문지들이 거칠게 꽂혀 있었다. 크리스와 세라는 무의식적으로 책 제목을 읽었다.


“운명의 신호.”

“마법의 잔상과 주문에 관한 이야기.”

“몽인, 그들은 누구인가.”

“이건 653년에 있었던 책봉식⋯⋯. 이건 나도 본 적 있어. 벌써 14년 전이네.”


크리스의 시선이 책장 밑으로 향했다. 거울과 함께 툭 튀어나온 책 한 권이 보였다.


“시호와 운호?”

 

크리스는 천천히 책을 들어올렸다. 책은 크리스의 엄지손가락처럼 두꺼웠다. 세라가 천천히 책을 넘겼다.


“사람들의 사진이네.”

“근데 이름 말고 적혀 있는 게 없어.”

 

종잇장이 넘어갔다. 사람의 사진과 이름, 그리고 이상한 숫자들이 나열되어 있었다.


“근데 시호랑 운호가 뭔데.”

“나도 잘 모르겠어. 그냥⋯⋯.”


넘겨지던 종이가 멈췄다. 맨 끝 장. 한 사람의 사진이 보였다. 순간, 찢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두통이 몰려왔다. 무언가 계속 머릿속에서 재생됐다. 누군가의 손 모양, 누군가의 반짝이는 장신구, 누군가의 푸른 눈동자. 그.


“크리스. 괜찮아?”


그리고 두통과 함께 느껴지는 따뜻한 무언가가 눈에서 흘러내렸다. 손바닥으로 닦아내니 물이었다. 레베카가 비틀거리며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그녀가 크리스의 어깨에 손을 올리려던 순간.


누군가가 밖에서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침입이다!”


이상한 평화를 깨고 굉음이 들려왔다. 주변이 뒤죽박죽으로 뒤섞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