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오는구나.
범이 창문을 바라보며 말했다. 곧 구름 한 점 없던 밤하늘이 잿빛으로 물들고 천둥 소리가 울려퍼졌다. 그리고 이내는 장대비가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연성은 그의 뒷모습을 노려보다 고개를 돌렸다.
어머니의 장례식 날에도 오늘처럼 비가 내렸다. 그는 분향실 앞에 서 있었다. 복도에는 근조화환들이 늘어서 있었다. 정선 비서는 입구를 지키고 서 있다가 들어오는 손님들을 안내했다. 상조업체 직원은 조의금함 옆 작은 책상에 앉아 무신경한 얼굴로 장부를 작성하고 있었다. 이 식장을 채우는 사람들의 태반은 그저 백양의 외동딸에게 눈도장 한번 찍어 보고자 얼굴을 비춘 것이리라. 연성은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상주 완장이 팔뚝을 옥죄는 것만 같았다.
그룹의 임원들은 조문객들의 발길이 뜸해질 무렵 하나 둘씩 스멀스멀 등장했다.
-상심이 크시겠습니다.
-회장님께서는 참 훌륭한 분이셨지요. 이리 빨리 떠나실 줄이야...
-백양의 미래를 위해 저희도 적극 지원하겠습니다.
-위로의 말씀 감사드립니다.
연성은 고개를 숙인 채 억지로 입을 열었다. 그들은 청년을 둘러싸고 하나하나 악수를 청했다.
-앞으로 어머님을 대신해 잘 부탁드립니다.
-유산 배분에 문제가 생기거든 절 불러주십시오.
그중 한 명이 말했다. 옆에 있던 여자가 그러지 마, 라며 그의 팔을 장난스레 툭 쳤다.
-그럼 저희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조심히 들어가십시오.
연성은 허리를 숙였다. 정장 입은 백발 뒤통수 여럿이 일제히 멀어져 갔다. 이어 식장 입구의 유리문이 펄렁 닫혔다. 연성은 주머니에 양손을 찔러넣고 제단으로 시선을 돌렸다. 액자 속의 여인은 입을 다문 채 굳은 표정으로 정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짧은 청흑색 머리카락, 동해 바다처럼 푸른 눈동자, 다소 주름졌지만 강인하고 날카로운 인상. 그 모든 것이 살아있는 듯 생생했다.
접객실에서 육개장 냄새가 풍겼다. 손님들이 그릇과 수저를 달그락거리며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백양도 이제 망조가 들려나 보군.
안타깝지만 명운이 다한 게지.
저주야, 저주. 전대 회장도 단명했잖나. 전생에 나라라도 팔아먹었나.
저 집, 달리 친척도 없다지? 이참에 우리 딸내미하고 결혼이나 추진해 볼까? 지금이 아니면 언제 백양그룹을 멋대로 주물러 보겠어.
이 양반아. 자네 딸 나이가 벌써 사십 아닌가? 허허, 거 순 도둑놈이구만!
-아가씨.
정선 비서가 육개장과 편육, 약간의 김치가 담긴 식판을 들고 들어왔다.
-좀 드세요.
-배 안 고파.
-하루 종일 드신 거라곤 물 한 잔뿐이었잖습니까. 그러다 쓰러지시면 어떡하려고요.
-왜? 내가 죽으면 그룹이 무너질까 봐?
-네?
정선 비서의 얼굴에 당혹스러움이 비쳤다. 그는 말을 이어가려 노력했지만 연성은 미간을 찌푸리며 그의 손을 쳐냈다.
-됐어. 이딴 기괴한 집안 아주 지긋지긋해. 할머니도, 당신도 다 짜증나!
-아가씨!